도림1리 청림 마을 - 볕[陽]과 숲[林]이 어우러진 선비골의 마을
- 작성일
- 2016.07.26 13:33
- 등록자
- 문OO
- 조회수
-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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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道林’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날 풍수에 능한 사람이 이 마을에서 승달산을 바라보고 노스님 셋이 경을 읽고 있는 노승예불형의 吉地를 보았다. 둘러보니 인근의 남성리 소살봉은 보살산이고 예전 목대 앞에 있었던 석산(딴산)은 칠성산의 형국이었다. 해서 보살 할멈이 격양동에서 밥을 지어 칠성산에다 바쳐 놓으면 승달산의 스님이 공양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온 것이다. 또한 승달산의 12봉우리가 12제자가 되어 스님에게 인사를 하는 형국이어서 때가 되면 선비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는 곳이라 하여 도림이라 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1981년 목포에 있었던 목포대학교가 이 마을로 이전한 것을 보면 선인들의 예견지명의 지혜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당시 목포대 유치를 주도했던 사람은 남성리의 배석오 선생과 이 마을 삼천재의 후손인 박희양씨였다. 대학을 유치하면서 많은 잡음도 있었고 난관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청계면의 발전을 위한 중요한 계기를 만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청림은 양촌과 함께 도림1리에 속하는 마을이다. 청림은 숲이 무성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양촌은 따뜻한 마을이라 해서 불려진 이름이다. 원래 도림1리에는 승달산에서 내려오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백운정과 도림동 대흥동 그리고 양촌과 청림 등 다섯 마을이 있었으나 개울 건너 백운정과 도림동 그리고 대흥동 일부는 목포대학교 부지로 들어가고 지금은 陽村(陽之村) 과 靑林으로 이루어졌다. 白雲亭과 청림은 무안박씨들이 주로 살았고 양촌과 대흥동은 청주한씨들 그리고 도림촌은 전주이씨들이 주로 살았다. 또한 이 마을은 상대미 천치골 사장골 사직골 등 네 개의 골짜기로 이루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양촌 마을의 입향조는 500여년 전에 터를 잡은 청주 한씨 韓番仁(자-기옥, 호-遯菴)이다. 그는 장흥군 장동면 북교리에서 세거하다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이곳 도림리 鍮店洞에 터를 잡았으며 명예와 영리를 추구하지 않고 자연에 묻혀서 일생을 보냈다. 원래는 이 마을이 국씨들의 터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국씨는 한 가구도 없고 마을 주변에 묘만 남아있다.
청림 마을은 임란 이후 들어온 무안 박씨가 입향조다. 태봉 마을 앞 작천에서 분가한 박 제 장군의 후손들이다. 박 제는 임란 때 장수로 보평산 전투와 그 부인인 여산 송씨의 열녀행으로 널리 알려진 장군이다. 여산 송씨가 순절한 이후 두 번째 부인으로 평강 채씨를 맞았는데 그 분의 후손이 청림마을로 들어온 것이다.
이 마을은 승달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물이 흔했다. 목포대학교가 이곳으로 이전하기 전까지는 청림마을 뒤에 있는 물맞이고랑은 많은 사람이 신경통과 관절염 치료를 위해 줄을 설 정도로 수량도 풍부하고 효험도 있었다. 지금도 주민들은 ‘앉은뱅이도 이 고랑에서 물을 맞으면 벌떡 일어설 정도로 효험이 있는 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목포대학교가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지하수 개발 등이 이루어져 현재는 마을 주민들이 쓰는 식수마저 고갈된 상태다.
도림동의 전주이씨 입향조는 완풍대군 7대손 이근용((1590-1633)이다. 공은 담양 월산면 홍농에서 살다가 이 마을로 들어왔다. 입촌 이유는 뚜렷하지가 않다. 우와리(목포대에서 청계리로 넘어가는 고개)에 우산재라는 전주이씨 제각이 있다.
승달산에는 골짜기 골짜기마다 암자들이 있었다. 전하는 말로는 승달산 자락에 49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많은 수도승들이 암자에서 공부를 했으며 좋은 결과를 얻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사월초파일이 되면 마을 앞은 그야말로 사람바다였다. 목포 해남 등지에서 법천사를 가려는 사람들로 하루 종일 마을 앞이 붐볐다고 한다. 그때는 마을에 두 개의 주막밖에 없어 드물게도 주막 앞에서 줄을 서는 진기한 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고인돌이 많았다. 은진팬 평버들이라 하는 곳에는 고인돌로 이루어진 산이 있을 정도였다. 그중 상당부분이 공사장에서 사라지고 몇 기만 현재 전시용으로 남아있다. 또한 목포대 옆 대암동에도 고인돌이 많이 있다.
서남부 지역 남로당의 근거지였다
청림 마을엔 무안 박씨 재실(평강 채씨 재실이라고도 함)인 경모재가 있고 양촌 마을엔 나주 임씨의 제각인 화산재가 있다. 경모재는 원래 뒷고랑에 있던 것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4칸 팔작지붕에 삼문이 있으며 재각 안에는 5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2005년에 중건했다. 화산재 또한 4칸 팔작지붕이며 삼문이 있다. 목포대 옆 대암동이라 부르는 곳에 무안박씨 제각인 영대암이 있다. 전체가 시멘트 구조물로 이루어진 제실은 5개의 현판과 11개의 주련이 달려있다.
목포대학교 경내엔 삼천재라는 서당 겸 재실이 있으며 박순 효자각도 있다. 효자각은 두 개의 효행비가 앞에 있으며 1칸의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졌다. 朴 洵(1681-1765. 자-윤보. 호-竹圃)은 지극한 효자였다. 병석에 있는 모친에겐 꿩고기를, 부친에겐 죽순과 잉어를 하늘의 도움으로 마련해 부모를 봉양한 효자였다. 박 순은 삼천재의 주인공인 박성지의 6대조이다. 또한 효자각에서 조금 떨어져 아래에 있는 三遷齋는 三休亭이라고도 하는데 1942년 박성지가 엄친 박기윤의 생전의 행적을 기리고 후세의 산 교육장으로 삼고자 지은 것이다.
삼천재는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 지붕의 전형적인 정제 건물로써 기둥 하부를 석재로 하였어도 육중하면서 단아한 고풍을 견지하고 있다. 정면 3칸의 솟을 대문 역시 석재 위에 지어, 본채와 잘 어울리고 있다. 경내 좌우에 은행나무와 줄 가시나무가 있으며, 경내 우측에는 무안 박공 사적비가 있다. 현재 역사문화학부 전통문화 교육장으로서 한문학 및 한국 전통문화에 관련된 교과목을 강의하고 토론하는 교육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삼천재는 목포대학교 소유지만 효자각은 무안 박씨 가문의 소유다.
목포대학교를 중심으로 냉골 솔동재 범바우 평버들 천치골 따박골 사장골 사자바위 이패빠골 수리바위 큰골 작은큰골 갱기재 뒷고랑 매봉 양촌재 안산재 빈대절터 숯골 토골 사직골 등의 많은 지명이 남아 있다. 이중에서 천치골은 목포대학 뒤에서 법천사로 오르는 길로 예전에는 천치동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빈대절터는 사장골에 있으며 지금도 돌을 들치면 빈대가 나온다고 한다.
청림 마을은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서남부 지역 남로당의 근거지였다. 이 마을 출신 박병관과 박공하의 영향을 받아서 청계면의 인재들뿐 아니라 인근 지역의 사람들도 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것이다. 실지로 이 마을 주민 21명을 비롯해서 구로리 관동 마을의 20여명, 서호리 기동 마을의 13명, 복길 마을의 주민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낸 것은 이 마을을 중심으로 형성된 좌익 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민들은 낮에는 태극기를 달고 저녁에는 인공기를 달 정도로 사상의 혼란을 가져왔으며 살기 위한 치열한 생존의 몸부림이 펼쳐졌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마을 뒤 천치골에서는 이 마을 주민들이 죽창의 피해를 많이 입기도 하였다.
당시 중심 인물이었던 박병관은 광복 이후 서울시 남로당 위원장을 역임하고 월북해서 주요국 북한 대사로 나가기도 했던 인물이며 박공하는 일제 강점기 때 청계 면장을 지냈던 인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