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림2리 연곡 마을 - 명당의 전설을 안고 있는 청계면의 중심 마을
- 작성일
- 2016.07.26 13:38
- 등록자
- 문OO
- 조회수
- 660
첨부파일(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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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곡은 도림2리에 속한 마을로 칠성동 장터 연곡으로 이루어졌으며 목포대 앞의 광-목 간 도로에서 아래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우로는 승달산에서 발원한 연곡천이 흐르고 아래로는 청수리 잔등에서 발원한 용개천이 흐르고 있다. 두 개의 천(川)이 만나 연동개를 이루며 복길 간척지를 적시고 있다. 원래 연곡천은 S자 형으로 흘렀으나 현재는 목포대에서 직선으로 흐르고 있다.
마을은 승달산을 주산으로 하고 보살봉을 마주하고 있다. 칠성동은 현재 청호주유소 주변을 말하는데 예전에 7개의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모두 고인돌로 추정되는 바위인데 이곳을 개발하면서 목포대서 연구용으로 가져가거나 주변의 사방공사에 쓰여져 지금은 하나도 없다. 또한 이곳에는 물이 잘 나는 샘이 있었다.
장터는 연동개 주변의 연곡 마을 아래에 있는 지역이다. 60여 년 전부터 場이 섰던 곳이어서 붙여진 지명인데 상마리 평림 마을 앞에 있었던 장송장이 이곳으로 옮겨진 듯하다. 3일과 8일에 장이 섰는데 복길리와 구로리에서 잡히는 많은 해산물들이 이곳에서 거래되었다. 한때는 우시장 개설을 검토할 정도로 장터가 커가는 규모였으나 80년대에 복길 간척이 이루어지면서 간척지로 장터를 옮기자 활성화 되지 못하고 없어져 버렸다.
이 장터가 지리적으로 아래쪽에 있어 비가 많이 올 때는 연곡천과 용개천의 두 개천에서 내려오는 물을 감당하지 못한다. 지난번의 장마에도 갑자기 불어나는 물에 이곳에 살고 있는 4가구가 물에 잠기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연곡은 연이 심어져 있는 골짜기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풍수적으로 연잎의 형상이어서 연동이라 했으나 주민들은 잘 모르고 있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연잎의 줄기와 꽃이 만나는 지점이 현재 영화밥상의 자리이다. 풍수적으로 대단히 뛰어난 자리인 것이다. 이처럼 자세히 보면 연곡을 포함한 도림리 전체가 불교와 관련이 깊다. 실지로 도림리 이전의 지명은 절에서 제사를 지낸다는 寺祭리(師弟동 또는 士才동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이다. 마을유래지에도 ‘蓮谷은 입석 마을 아래에 있는 마을로 조그만 연못에 연꽃이 피어 장관을 이루었다 하여 유래된 지명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는 불교와 관련된 어떠한 것도 없다.
예전부터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도림리는 승달산에서 도를 닦는 12명의 상좌가 보살봉 앞에 칠성단을 만들어 놓고 촛불을 켜고 예불을 올리고 있다’는 형국이다. 12 상좌는 연곡을 포함하여 도림동 청림 양지촌 백운정 대흥동 월암 격양동 칠성동 입석 유점동 평버들 등 도림리에 속한 12개 마을 이름을 나타낸다. 칠성단은 칠성동을 말하며 두 개의 촛불은 승달산의 촛대봉과 보살산 아래 남성동의 장흥 고씨들 산의 촛대봉이다.
청계면의 중심 마을
연곡은 명당과도 관련이 있는 전설이 있다. 승달산에서 수행하던 노스님이 예불하면서 염주를 떨어뜨렸는데 떨어진 곳이 연곡이었다 한다. 염주가 떨어진 곳은 천하의 명당으로 3정승 6판서가 代를 이어 나올 수 있다는 곳이다. 하지만 염주가 어디에 떨어졌는지 아직까지 혈처를 찾지는 못하고 있다.
문헌으로 지명의 유래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 무안현 일서면 蓮洞이 나온다. 하지만 1912년과 1917년의 자료에는 연동이나 연곡의 지명이 나오지 않는다. 이후 1987년에 가서야 청계면 도림리 연곡으로 나오며 점차 인구가 많아지자 현재는 도림7리까지 分里되었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뚜렷하지가 않다. 마을유래지에는 무안박씨가 먼저 들어오고 이후 전주이씨가 들어왔다고 하는데 주민들은 도림1리의 입향조를 말하는 것이라 한다. 예전에 이 마을은 현재 청계면 노인회 분회가 있는 곳에서 몇 가구만 살고 있었다. 그 아래로는 논과 밭이었으며 주변에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가였다고 말하고 있다. 마을의 형성도 장터가 들어오고 면사무소가 개설되면서 비로소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그렇기 때문에 뚜렷한 입향조가 없다. 굳이 말한다면 원주민이 없이 다양한 성씨가 모여 이룩한 복합성씨의 마을이라 할 수 있다.
이 마을은 면사무소와 보건소 복지회관 그리고 농협이 들어서 있어 문화와 교육과 교통 복지 그리고 경제의 요충지가 되는 청계면의 중심마을이다. 하천과 시내가 복개를 하여 마을이 이루어져 복개라는 지명도 남아 있다.
이 마을은 조리형으로 만호 터라고 알려져 있다. 해서 원주민보다 외지인이 쉽게 정착하고 성공도 빨리 할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살 수 있는 곳이다. 지역적으로 바닷바람이 세어 3월에도 눈이 잘 녹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다. 또한 마을에 천석군의 터가 두 군데 있다고 한다. 하나는 현재 한일빌라가 들어 선 곳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밥상 아래 밭이다. 한일빌라 자리는 일제강점기 때 청계면의 천석군 한양조씨 조자현이 살았던 터이지만 영화밥상 아래는 아직 주인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1980년대 목포대학이 들어오면서 주민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졌다. 주민들 대부분이 상업을 통해서 소득을 얻고 있으며 농사를 짓는 주민들은 별로 없다. 한국전쟁 때 많은 주민들의 사상자를 냈던 청림 마을과 인접하고 있어 이 마을도 많은 피해가 있었지 않을까 여겼으나 의외로 주민들의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복합성씨의 마을이지만 서로 협조하고 양보하여 화목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연동개에 대한 주민들의 노래 두 곡을 채록했다.
산이좋아 연동개냐
물이좋아 연동개냐
산도물도 좋다마는
다리좋아 내가사네
산이좋아 청계더냐
물이좋아 청계더냐
산도물도 좋다마는
연동다리 못믿어서 못가겠네
참고로 풍수지리로 널리 알려진 옥룡자 유산록의 승달산 관련 일부를 싣는다.
백천(百川)이 회조(回朝)하고 만산(萬山)이 폭주(輻輳)하니
갑산정기(甲山精氣) 모은 곳에 설법가사(說法袈娑) 벌였으니
아름다운 저 형상(形象)이 십이상좌(十二上佐) 분명하다
발우(鉢盂)는 동쪽에 있고 운암(雲岩)은 남쪽에 있도다
저 노승(老僧)의 거동 보소 백팔염주(百八念珠) 손에 쥐고
팔폭장삼(八幅長衫) 떨쳐입고 모든 제자 강(講) 받을제
그 중의 늙은 중이 스승께 문안(問安)할 제
염주(念珠) 하나 떨어져서 수구원봉(水口圓峰) 되었고
간태금성(艮兌金星)이 충천(沖天)하니 혈재방원개정처(穴在方圓蓋粘處)라
사륜석(四輪石)은 뒤에 있고 금어옥대(金魚玉帶)는 아래에 있고
팔백연화(八百煙花) 놓여있고 삼천분대(三千粉袋) 모였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