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리
- 작성일
- 2016.07.26 16:18
- 등록자
- 문OO
- 조회수
- 1034
강정리는 청계면소재지에서 서북쪽 무안공항 방면 5㎞ 가량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앞은 청계만이 펼쳐져 있으며 뒤에는 도대봉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 무안군 일서면 지역으로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태천 개꼬리 마을을 합하여 무안군 청계면에 편입되었다. 뒷산인 도대봉은 조선시대 고림산 봉화대가 있었다.
강정리는 강정과 태천의 두 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모두 나주 정씨의 집성촌으로 강정이 큰집 태천이 작은 집에 해당한다. 1600년대 중반 압해에 살던 나주 정씨 사보의 아들 덕주와 덕용이 고림봉이라 부르는 봉대산 밑으로 이주해왔다. 그러다 德周(1625-1706. 자-子聖, 호-湖隱)는 지금의 강정 마을로 德容(자-자용, 호-윤재. 1644-1705)은 태천으로 옮겨서 각각 마을을 형성하였다.
문헌으로 살펴본 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호구총수에 일서면 五台川으로 나온다. 강정이란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1912년의 자료에는 일서면 강정리 태천리로 나오며 이후 1917년의 자료에 청계면 강정리 강정 태천으로 나오며 이후 모든 자료에는 동일하게 나온다.
강정마을에 천주교 공소가 있으며 태천마을에는 열부각이 있다.
봉대산 밑의 나주 정씨 동족 마을 - 강정2리 태천
태천은 강정2리에 속하는 마을로 고림봉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고림봉은 마을의 주산으로 봉대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조선시대 주요한 통신수단으로 활용했던 산이다. 참고로 무안에는 4개의 봉대산이 있다.
태천이란 지명의 유래를 마을 유래지에서는 ‘台川은 강정 마을의 동편에 위치한 마을로 지형이 별모양 같고 마을 앞에 인천강이 있어 태천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인천강이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지명의 유래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예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다.
台川의 台는 마을의 주산인 봉대산의 臺와 비슷하다. 마을 앞에는 복룡리 장자산에서 발원한 거대한 하천인 복룡천이 흐르고 있다. 해서 台川의 지명유래는 ‘봉대산 아래의 마을로 큰 하천을 안고 있는 마을’로 정의할 수 있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정덕용(자-자용, 호-윤재. 1644-1705)이다. 공은 원래 봉산(봉대산 아래. 강정과 태천의 중간 지역) 아래에 살았으나 분가하면서 형인 정덕주(丁德周. 1625-1706. 자-子聖, 호-湖隱)는 강정으로 가고 공은 태천으로 왔던 것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주경야독을 실천하였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좋았다.
마을 앞으로는 개꼬리 명당이라 일컫는 개[犬] 형상의 전주이씨 문중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마을 앞의 강정로 건너에는 부섬산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공항도로 공사와 석산 개발로 약간 어수선한 분위기이지만 산림이 우거져 있을 때는 소쿠리 형국의 지형으로 꽉 짜인 좋은 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개 형국의 산은 꼬리를 마을 앞을 흐르고 있는 복룡천에 닿아 있다. 예로부터 짐승의 꼬리 부분은 穴 자리가 있다하여 풍수가들의 사랑을 받아왔는데 이곳도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이곳에는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개의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은 공항로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이다.
마을 앞 강정로 너머의 부섬산은 두꺼비 형국의 산이다. 부섬산은 우리 말 어휘에 따른 동각 할매의 깔따구 전설이 있다. 현재 이 산 기슭에는 석산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대형 화물차의 잦은 출입과 주변에 뿌옇게 돌가루가 날려 한참 떨어진 마을에 있는데도 목이 따가운 느낌을 준다.
봉대산은 만남의 장소였다
마을의 주산인 고림산은 조선시대 봉화를 올렸던 봉대산이다. 고림산이 일제강점기 때 도대봉으로 불리면서부터 道垈峯烽燧라고도 하였다. 고림산은 신안을 비롯한 목포의 유달산과 광주의 무등산까지 보일 정도로 사방이 확 트여 있어 관측이 용이한 곳이다. 비가 오지 않을 때는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며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들이 봉화를 올렸던 산이기도 하다.
해방 직후에는 봉수대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었고, 1970년대까지만 해도 축대와 우물터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고, 봉수대를 쌓았던 것으로 짐작되는 자연석만이 도대봉 중턱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얼마 전까지 이곳은 만남의 장소였다. 추석이 되면 인근 마을의 선남선녀가 각기 좋은 옷을 입고 이 산에 올라 서로를 만나 안부를 묻고 놀이를 하는 등 즐거움과 회포를 풀었던 장소였다. 하지만 지금은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람의 왕래가 없다.
예전에는 이 마을이 짐이 펄펄 나는 마을이었다. 주민들의 말대로 부자 마을이었다는 것이다. 주변 마을에서 쌀을 빌리려 오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그 마을들이 더 잘 사는 곳이 되었다.
또한 장수마을이다. 90대 이상의 노인들이 3분이나 있고 80대 노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물이 좋은가 하고 물었으나 마을에 샘이 바위샘 새샘 등 두 개가 있었으나 늘 부족했다고 한다. 또한 물이 짜기 까지 해 식수로는 적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장수 노인이 많은 것은 가정에 커다란 어려움이 없고 나라의 의료혜택과 주변 환경이 좋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마을은 늘 물이 부족했다. 해서 정월 보름만 되면 이 마을 전 주민들이 나서서 물 타러 다녔다. 즉 물이 잘 나오는 이웃 마을인 도대 마을에 찾아가 몰래 물을 길어 오거나 물길을 만들기도 하였다. 해서 정월 보름날은 물을 가져오려는 사람과 물을 지키려는 횃불로 장관을 이루었다.
마을에 경주이씨열녀각이 있다. 열녀각의 주인공인 이씨는 23세에 남편인 정규몽을 사별하고 세 살 짜리 아들을 키우게 되었다. 주변의 거듭된 권고에도 재가를 하지 않고 어린 아들을 키우며 가난한 시부모를 모시니 주변이 모두 감동하였다. 특히 아들 행진은 어머니의 지극한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1945년 을유년에 마을 앞에 열녀각을 세우고 매일 아침 돌보았다고 한다.
마을에는 도대에서 분가해 온 강정제일교회가 있다. 이 마을을 중심으로 복룡리 도대리 구로리 등 대부분의 마을마다 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운영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마을에서 도대로 넘어가는 잔등을 국수댕이라고 한다. 이런 지명은 복룡 마을에도 있다. 마을 앞에 있는 들을 염밭들이라 한다. 예전에 염전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주민들은 모르고 있었다. 염밭들 앞에 있는 버선처럼 생긴 버선배미 들이 있다, 또 그 주변을 번짓들이라 한다. 씨암과 안씨암의 지명도 있다. 마을회관 앞에 마을 공동창고가 있다. 이곳은 마을의 각종 농자재와 농기계들을 보관하는 자리다. 봉대산에는 마당바위 여사바위 병풍바위 주롱바위 꽁에바위가 있다. 주민들은 여시바위의 여시가 울면 반드시 주민들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