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봉리
- 작성일
- 2016.07.26 16:20
- 등록자
- 문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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台峰里는 청계면 소재지에서 무안쪽으로 4㎞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광주 - 목포간 국도 1호선의 우측에 자리하고 있다. 본래 무안군 이서면 지역으로 태봉산이 있으므로 태봉이라 하였다. 달성배씨 집성촌으로 태봉이 큰집 청천리의 상청천이 작은집으로 불린다. 마을 뒤에 골프장이 들어섰는데 골프장 건설 과정에서 마을과 마찰이 있어 주민들이 많은 피해를 봤다.
문헌으로 지명의 변화를 살펴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군 이서면 上台峰 下台峰으로 나오다 1912년에는 이서면 臺峰리로 나온다. 그러나 1917년의 자료에는 청계면 태봉리 台峰으로 나온다. 이후 현재까지 台峰으로 쓰고 있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이동마을을 병합하여 무안군 청계면에 편입되었다.
자료에는 구리골, 구시내, 뒷똘, 먹굴, 산당, 상태, 중모실, 하태 등의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달성배씨의 태봉사와 김해김씨의 삼왕묘 그리고 10여개의 비와 두 개의 효열각 두 개의 나주정씨 제각 2기의 고인돌 등이 있다.
당산제가 매년 열리는 달성배씨 집성촌의 마을 - 태봉리 태봉
태봉은 청계면 태봉리의 마을로 광주 - 목포 간의 국도 변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의 입지 조건이 여러 면에서 청천리 맑으내 마을과 비슷하다. 달성배씨의 집성촌이라는 점과 아름드리의 당산나무 여러 그루가 마을의 역사와 전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 그리고 청천사와 태봉사의 사당이 배씨의 조상들을 모시고 있다는 점도 비슷하며 증봉과 태봉산이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 등이 같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큰집과 작은집의 관계라고 한다.
마을 이름인 台峰은 풍수적 지형의 이름이다. 三台는 별이름을 나타내는 말로 큰곰자리에 있는 上台・中台・下台를 나타내기도 하며 조선 시대에는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을 이름하기도 했다. 또한 세 곳의 맥을 이름하는 호랑이를 지칭하기도 한다. 台峰은 여기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일봉은 태봉산인데 이 마을의 주산을 말하며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형이요, 이봉은 숫호랑이가 먹이를 노리고 있는 형을 가진 이 마을 앞 똘당산이요, 삼봉은 청계북교 뒷산인 호봉을 말하며 이를 합하여 삼태라 한다.
마을 뒷산인 태봉산이 伏虎形이라 하여 ‘伏虎’ 또는 ‘台峰’이라 칭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자칫 청계리의 胎峰山과 혼동을 가져올 수 있지만 이곳의 태봉산은 아이의 태(胎)와는 다른, 산의 형국이 엎드린 호랑이와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태봉산 정상의 사자바위에는 한 사람의 시신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있어 예전에는 그곳에 투장(偸葬 - 명당자리로 여겨진 곳에 자기 집안의 묘를 쓰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 마을에서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낼 때마다 시체를 파서 주인을 찾아주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이 마을의 최초 입향자는 달성 배씨 배수문(마을유래지에는 임란공신인 배명으로 나온다)이다. 裵繡文(자-찬보, 호-숭헌. 1456 - ?)은 청천리 입향조인 증 암 배 회 공이 수문 수채 수영 수장 등 네 명의 후손을 두었는데 수문은 장남이다. 해서 이 마을은 무안 거주 달성배씨의 큰 집이기도 하다. 수문은 승달산의 맥을 힘차게 이어받은 복호산을 주산으로 하고 오른쪽에는 우와산의 소뿔바위를, 앞으로는 소가 먹이를 먹는 구수둠벙 그리고 마을 앞 서쪽에는 개바위가 있어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길지인 이곳에 마을을 조성하였다. 마을 앞에는 해풍과 마을 위에서 불어오는 을진풍을 막기 위해 30 여 그루의 장수목 팽나무를 마을 앞 시냇가에 심어 태풍을 막고 환란과 각종 재앙을 막아 풍요와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달성배씨에 이어 김해김씨, 파평윤씨, 광산김씨 등이 세거하여 마을을 이루고 생활을 하여왔다. 이 중 파평윤씨 문중이 제일 먼저 쇠퇴하여 마을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원인은 쇠뿔바위의 전설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이어 광산김씨가 떠났고 지금은 김해김씨와 두 성씨가 마을의 주축을 이루어 살고 있다.
태봉은 태봉리에 속한 마을로 구릿골 구시내 상태 하태 뒷돔(뒷똘)으로 이루어졌다. 상태와 하태는 예전에 마을을 가르며 길이 나 있었는데 길 위를 상태, 아래를 하태라 불렀다. 마을에는 지금도 팽나무가 많이 있는데 예전에는 더 많은 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줄어든 것은 주민들이 보릿짚을 나무 주위에다 쌓아놓은 것이 빌미가 되어 죽은 것이다. 왜냐하면 보릿짚은 양잿물 성분이 많아서 양잿물에 의해 고사된 것이다.
한 개의 사당과 한 개의 묘당이 있어
마을에는 달성배씨 사당인 태봉사와 김해김씨 묘당인 삼왕묘가 있다. 태봉사는 마을의 오른쪽에 있으며 1980년 3월에 건립되었다. 달성배씨 시조를 주벽으로 모시고 역대의 명조들을 배향하는 사당이다. 매년 음력 2월 말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여기에는 문양공 배지타, 무열공 배현경, 달성군 배운용, 금헌 배정지, 율헌 배균, 증암 배회, 희암 배명, 효우당 배협 등 8위의 선조를 모시고 있다.
삼왕묘는 마을 뒤에 있으며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과 양왕 흥무왕 등 세 분을 모신 묘당이다. 1946년 김해김씨 후손으로 이 마을에 거주하는 김 용운, 종욱 두 형제가 가산을 털어 세웠다. 처음에는 두 사람에 의해서 제사를 지내다가 이제는 군내의 김해김씨 후손들이 매년 날을 받아 크게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한 김해김씨 문중에서는 두 형제의 공덕을 기려 묘당 입구의 길 가에 공적비를 세웠다. 이외에 구시내와 산당에 나주정씨 제각이 있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신흥동 부근에 청수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에 태봉도요지가 있다. 청수리 도요지라고도 하는 이 도요지는 현재 흔적만이 남아 있는데 인화문의 도자기를 구운 듯 하나 아름다운 청자유가 칠해진 고려 청자풍의 파편도 많이 출토 되어 청자와 인화문의 혼요가 아니었는가 추정되는 도요지다.
이 마을에서 매년 정월 14일에 이루어지는 당산제 또는 도제는 우리 지역의 몇 안 되는 당산제로 문화적 가치가 높은 자산이다. 이 제는 정월 14일 밤에 웃 당산을 시작으로 아랫 당산까지 이어진다. 제관은 3명으로 농악의 징, 북, 깡쇠를 치게 되며 축관은 깡쇠(꽹가리)를 잘 치는 사람으로 선정한다. 웃 당산은 생식으로 아랫 당산은 화식으로 제물을 준비하며 새벽 세시를 넘기지 않는다. 제의 목적은 농사의 풍년과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고 질병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윗 당산은 당산 영감이 있으며 마을의 양어장 부근에 있고, 당산 할멈이 있는 아랫 당산은 마을입구에 있다. 당산 숲이 형성된 이유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태봉의 지형이 호랑이가 엎드린 형국이라 숲을 좋아하는 호랑이를 위해서 당산 숲을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몇 년을 사이로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을진풍(동남풍이라는 제주도 사투리)을 막기 위해서 형성한 숲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이 바람을 막지 못하면 마을이 폐촌이 된다는 말이 전해져오고 있다.
이 마을에는 유달리 비석이 많다. 마을 입구의 한국전쟁 때 나라를 지키다 순국한 사람과 부상 입은 사람을 기리기 위한 弔戰友碑를 비롯하여 애향비와 효행비, 열부비, 효자비, 공덕비, 선행비, 수소재 유적비 등이 마을의 역사와 전통을 말해주고 있다. 정리하면 효우당배공유허비1967, 청은배종현시혜공덕비1996, 추당배화규공적비 1976, 수소재선생배공유적비1990, 사당인 선환재가 있다. 금포선생달성배공사적비1989, 감역청파배공사적비, 태암배세응유허비1990, 죽포김종선숭선실적비2001, 삼왕묘 안에 1998년에 세운 가락국태조대왕성적비 가락국양왕유적비 신라흥무왕기적비가 있다. 또한 1993년에 세운 열부남원양씨기적비와 옆에 열려비, 달성배씨 3효자각(효자모헌배공사적비, 추은배공효행비, 지헌배공선행비)1984 등이 있다.
몰무덤이 있어
특히 1967년에 세워진 효우당 배협의 유허비는 나라 사랑의 정신을 보여주는 역사적 자료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의 사람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으며 재주도 특출하여 학문의 조예가 깊었다 한다. 틈이 날 때마다 공부를 하였으며 부모에게는 효를 다하고 형제간에는 우애를 잘 지켜 마을사람들이 ‘孝友堂’이라 이름을 지어 불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모아 진주성 싸움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진주성이 왜구의 수중에 떨어지자 대장인 김천일 장군 등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충절을 지켜 후세의 모범이 되었다. 태봉사에 배향하고 있다.
또한 태봉사 뒷산에는 주민들이 고분으로 여기는 말무덤(몰무덤에서 와전 된 듯)이란 커다란 봉분이 있다. 굉장히 큰 고분으로 관리가 되지 않아 나무와 잡초가 자라고 있어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봉분으로 볼 수도 없다. 봉분을 살펴보면 파헤친 듯한 흔적이 보이며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몰아서 죽였다 하여 몰무덤이라 하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 기록으로는 5기가 있다고 하나 1기밖에 발견을 못했다.
예전에는 마을 입구의 거북바위를 비롯하여 수십 기의 지석묘가 있었는데 밭을 경작하기 위해서 깨거나 묻어 버려 현재는 마을입구와 구시내에 각각 1기씩 2기밖에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처음 이 마을을 찾았을 때는 마을입구에 7기, 윗당산 나무 아래 1기, 구시내에 2기 등이 있었고 두 번째에는 .마을입구에 1기, 윗당산 나무 아래 1기, 구시내에 4기 등이 확인되었다.
마을 곳곳에 전해 내려오는 지명을 살펴 보면 구시내(삼왕묘 아래 지역), 구릿재(저수지 위 - 마을에서 십리가 못되고 구리가 된다 해서 붙여진 이름), 가쟁(태봉 앞에 있는 들), 각커리재(구리골에서 몽탄의 우적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개바우(태봉교 아래에 있는 바위), 남생이 바우(태봉입구에 있는 바우. 모양이 거북과 같음). 동막골(먹굴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해가 뜨는 동쪽에 있는 골짜기) 동막골제와 태봉제가 있다.
또한 똘당산(구시내 남쪽에 있는 산), 똘땅보(태봉 앞에 있는 보), 마염산(동막골 남쪽에 있는 산), 보밋들(정개이 옆에 있는 들), 복새등(먹굴 남쪽에 있는 들), 샛들(먹굴 앞에 있는 들), 쇠뿔바위(모양이 쇠뿔 처럼 생겼음), 이동=구릿골, 쟁개이(가쟁 위에 있는 들), 중보(가쟁에 있는 보), 태봉교(마을 앞에 있는 다리) 등의 이름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