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안1리 동암 마을 - 우리 군에서 최초로 장수마을로 지정된 마을
- 작성일
- 2016.07.26 16:21
- 등록자
- 문OO
- 조회수
- 1007
첨부파일(6)
-
이미지 남안리 동암1.JPG
580 hit/ 3.37 MB
-
이미지 동암2.JPG
384 hit/ 4.16 MB
-
이미지 동암3.JPG
388 hit/ 4.19 MB
-
이미지 동암4.JPG
368 hit/ 4.10 MB
-
이미지 동암5.JPG
364 hit/ 4.26 MB
-
이미지 동암6.JPG
399 hit/ 9.72 MB
동암 마을은 조선시대 3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으로 文名을 떨쳤던 옥봉 백광훈 선생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무안에서 광 - 목간 도로를 따라 목포 쪽으로 3㎞ 쯤 가면 청계북초등학교가 나온다. 그곳에서 좌회전 하여 1㎞쯤 들어오면 만나는 마을로 청계면 남안1리에 해당되는 마을이다. 누구나 이 마을에 들어서면 아늑함과 포근함으로, 그리고 주변 풍광의 수려함으로 감탄을 자아낼 수 있는 환경을 갖고 있다.
이 마을의 원래 이름은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처음에는 ‘절우정’이라고 불렀으나 이름이 좋지 않아 동암으로 개칭하였는데 이는 마을 동쪽에 바위가 많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 표지석에도 ‘마을의 주산인 마협봉이 새가 날아가는 형국이어서 절우정이라 했으나 이름이 좋지 않아 동암으로 바꿨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절우정이란 지명의 유래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1789년에 조선 왕조에 의해서 작성된 호구총수에는 ‘절우정’이나 ‘동암’ 특히 ‘남안’이라는 지명이 나오지 않아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운남면에도 동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동쪽에 해당하는 마협봉에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마을의 입향조는 수원백씨 白運憲(자-雲汝)이다. 백운헌은 해남 옥천에서 살면서 1644년 무과에 급제하여 水使의 벼슬에 오른 인물로 그 무렵에 전국을 휩쓸었던 가뭄을 피하여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백운헌의 조부는 백흥남으로 1603년에 무안 현감으로 재임하였으며 증조부 백광훈은 16세기 조선 최대의 시인으로서 추앙 받는 인물로 ‘관서별곡’을 지은 백광홍의 동생이다.
‘입향시조와 성씨자료’에 의하면 ‘백운헌은 특히 勇을 좋아하여 날마다 弓劒으로 일을 삼으니 사람들은 능히 세상을 구할 제목이라 칭송했는데 시대와 마음이 서로 엉키어 뜻을 얻지 못하고 마침내 林泉에서 늙으니 이 또한 하늘의 뜻이로다’ 며 아쉬워하는 기록을 남겼다. 마을에 ‘백장사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마을유래지에는 이 마을의 입향조로 ‘1776년(정조 원년)에 최씨가 최초로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하나 이미 1600년대 후반에 수원백씨에 의해서 마을이 이루어져 있어 잘못된 기록으로 보인다. 현재 타 성씨들이 몇 가구 살고 있으나 대개 백씨 집안과 외가나 인척의 인연을 갖는 세대들이다.
이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이 호치(虎齒)라는 지명을 지닌 곳이다. 청계북초등학교 주변으로 호랑이 이빨에 해당한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 호봉산(虎峰山)이기 때문에 호랑이와 관련된 지명이 붙여진 이름이다. 호치를 지나서 조금 들어오면 근대에 지어진 사찰 ‘봉불사’를 만난다. 봉불사를 지나 더 들어오면 1992년에 세운 ‘송은백공흥선행적비’와 ‘효자수원백공영방기행비’와 ‘백성채행적비’가 나란히 있고 ‘효열부이천서씨추모비’에 각을 올린 효열각이 있다.
그곳에서 조금 지나면 호미(虎尾)라는 터 위에 세원진 영모재(永慕齋)를 볼 수 있다. 이 제각은 수원 백씨 집안의 제각으로 1950년에 세우고 1992년에 중수했으며 이 마을의 입향조를 비롯한 문중의 선조들을 모시고 있는데 매년 음력으로 3월3일에 제사를 모시고 있다.
영모재를 지나 마을 앞에 들어서면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장승이 길가에 벌려 서 있다. 비록 우람한 장승은 아닐지라도 마을의 안녕을 지키기 위한 주민들의 손길을 느끼게 하는 상징물이다. 장승이 있는 곳에서 마을의 전경을 살펴보면 우리 지역의 제3봉인 마협봉(285ⅿ)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다.
마협봉 뒤편에는 19세기에 없어진 우리 지역 최대의 사찰로 추정되는 총지사 터가 있다. 이 마을과 총지사와 밀접한 관계는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마을 뒷산인 호봉산(虎峰山)에서 총지사까지 버선발로 갈 수 있을 만큼 절[寺刹]들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지금도 마을 뒤에 있는 밭을 파 보면 곳곳에서 오래된 기와 조각들이 나와 주민들은 예전에 이곳에 많은 집들 특히 절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또한 총지사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마을 뒤의 골짜기를 중골이라 하고 ‘중애미밭, 상좌밭’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으며. 담장재란 지명도 있다. 담장재는 총지사 중들이 마을로 자주 넘어와 시주를 요구하는 등 민폐를 끼치므로 이 마을 출신의 힘센 장사가 다시는 넘어오지 못하게 마을 뒷산의 총지사로 넘어가는 고개에 담장을 쌓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에서 마협봉 기슭을 거쳐 총지사로 넘어가는 재라 해서 총지재라고 붙인 이름도 있다.
군에서 최초로 장수마을로 지정
마을의 시정 앞 당산나무 옆에는 당산하네가 있고 마을 회관 뒤에는 당산할멈이라 칭하는 입석이 아직도 남아 있다. 지금은 당산제를 지내지 않지만 예전에는 마을의 안녕과 행운을 기원하기 위해 매년 한차례씩 모든 주민들이 나와 함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1960년대까지 마을 앞 수반이라 부르는 지역은 버드나무 숲과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금은 농로가 나있지만 아직도 군데군데 흔적이 남아있다. 전해오는 말에 수반에 숲이 없어지면 마을에 우환이 찾아올 것이란 말이 있지만 대부분 농지로 개발되었다. 또한 마을 앞 광장에서 마협봉을 쳐다보면 큰석골이라 부르는 골짜기에 하얗고 금빛 나는 자갈들이 많이 있었다. 마을 어른들의 말씀에 의하면 지나가는 도승이 ‘마협봉 큰석골에 있는 자갈들이 숲에 가려지면 그때서야 마을이 氣를 펼 것이다’는 말을 믿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마을은 우리 군에서 최초로 1995년 장수마을로 지정되었다. 수려한 산세와 깨끗한 공기 등 살기 좋은 환경이 이 마을이 장수마을로 지정된 요건이었다. 실지로 10여년 전에 105세까지 장수하신 할머니가 별세한 일이 있으며, 현재는 90세 이상 되신 노인들이 7분이나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105세의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며느리가 효부로 뽑혀 대통령으로부터 효부상을 받기도 했다. 널찍하게 가꾸어진 마을 광장에는 마을회관이 있고, 농산물 작업장과 웰빙 게이트볼 장이 있으며 꽃동산을 가꾸고 있다. 또한 마을 앞에는 산책로를 조성하기도 했다.
마을 앞에 있는 회관은 여느 마을처럼 마을 이름을 붙인 회관이 아니라 사람 이름을 따서 세운 회관으로 정훈 마을회관이라 한다. 이 마을 출신 정훈 선수가 올림픽에서 유도부문 동메달 수상을 기념하여 1993년에 官의 협조를 얻어 세운 회관이기 때문이다. 정훈은 북경 아시아 경기대회 유도에서 금메달,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마을 회관 2층은 짚공예 전시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마을은 물이 귀했다.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지층이 암반이어서 물이 모이질 않기 때문이다. 마을에 큰샘이라 부르는 샘이 하나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가뭄이 들면 매일같이 샘 주위에 늘어서 있는 아낙네들을 볼 수 있었다. 물을 뜨기 위해서였다. 샘은 쪽박으로 한바가지한바가지 뜰 수 있는 샘이어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해서 마을 앞 농지는 논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마을 뒤에 저수지를 두 개나 막았으나 턱없이 부족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지하수 개발이 이루어지자 비로소 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특히 상천동 앞을 흐르는 태봉천에서 양수기로 물을 퍼 올릴 수 있자 농지에 모를 심을 수 있었다.
마을 앞으로 골프장 가는 길이 있다. 골프장 측에서 길을 개설할 때 주민들하고 맺은 약속이 있었다. 그런데 골프장 소유주가 바꿔지면서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주민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