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1리 화설당 마을 -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정자의 마을
- 작성일
- 2016.07.26 16:28
- 등록자
- 문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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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설당은 사마1리에 속하는 마을로 창포만 쪽에 접해 있다. 호구총수는 물론이고 1917년 문헌인 조선면리동일람까지 청천리의 아랫마을이란 뜻인 ‘하청천’이라 불렸다. 그러다 일본제국시대에 들어 현재의 이름인 ‘화설당’으로 바뀌어졌는데 구체적인 이유는 주민들도 모르고 있었다.
화설당이란 이 마을 입향조인 류 자의 손자인 류 운이 지은 정자의 당호이다. 현재의 청천2리 하청천 마을은 청천리를 양분하여 윗마을은 물이 맑고 깨끗한 곳이라 하여 ‘맑으내’라고 하고 아랫마을은 ‘큰서당’이 있던 관계로 하서당으로 부르다 현재의 하청천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원래 광산 이씨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다 나주 다시면의 문암리에서 세거하던 문화 류씨 류 자가 아내의 고향인 이곳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柳 慈(1522 - 1607. 호- 晩圃, 훈련원 주부 역임)는 염결하고 정직하여 문필로 일찍이 세상에 문명을 떨쳤으며 義를 사모하고 禮를 좋아하여 자연에 묻혀 살면서 德을 길렀다. 임진왜란 때는 친척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우기도 했다. 손자는 柳 運이다.
柳 運(1580 - 1643. 자-건숙, 호-화설당)은 학문과 시에 능통하였으며 文名과 德이 주변에 떨쳤다. 특히 말년에 화설당이란 정자를 건립하고 당대의 석학이었던 우암 송시열, 수은 강 항, 남곽 박동열, 시남 유 계 등과 교류하며 학문을 논하고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화설당은 특이한 건축양식과 구조로 우리 지역에서 유일하게 조선시대 정자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특히 화설당이란 정자 이름은 당시 나주 목사였던 박동열이 이 마을에 들렀을 때 마침 눈 속에 피어있는 동백꽃을 보고 지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화설당이란 편액의 글씨는 송시열이 칡뿌리로 쓴 것[葛筆揮毫]이다.
정자 화설당에는 3가지 보물이 있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동백나무와 용침 그리고 괴석을 말한다. 이중 동백나무와 용침은 없어졌지만 아직까지 300여년 이상의 시간을 정자와 함께 해온 괴석은 화설당 옆에 지금도 자리하고 있다. 주민들 사이에는 문화류씨 집안 출가외인의 욕심을 경계하는 괴석에 대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마을은 화설당과 서당골로 이루어졌다. 화설당은 국도 1호선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아래 바다 쪽에는 해풍을 막아주는 숲이 조성되어 있어 그 숲을 숲거리라 부른다. 숲거리 너머를 ‘족판머리’라 부르는데 족판머리란 발 ‘足’자에 판자 ‘板’자를 써서 옛날에는 여기까지 배가 들어와 足板을 딛고 배에 올랐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그 주변을 주민들은 창포라 부르고 있다. 서당골은 국도 1호선 너머 화설당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지명에 유독 말[馬]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우선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마협봉이 있으며 그 아래로 암구마봉, 숫구마봉이 있고 마을의 주산에 갈마봉이 있다. 또한 현재의 회관자리를 말배미라 하고 그 앞에는 다박솔과 하마석이 있었다. 지금도 마을에는 목마른 말이 물을 마셨다는 갈마봉 아래에 통샘이 있다. 옆 마을은 사마동이다. 사마 벼슬을 한 사람이 있어서 司馬동이라 했다하나 다른 사람은 말을 관리했던 마을이라 해서 飼馬동이라 했다한다. 특히 사마동 옆 아래호치에서는 馬房이 있었다. 마방이란 외양간 마굿간의 설비가 있는 주막집인데 제주도에서 사육된 말이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이다.
갈마봉과 주치봉의 전설을 안고 있어
이 마을에는 문화 류씨 선산인 주치봉의 전설이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에 너나없이 피난을 가는데 문화 류씨 문중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모든 식솔들이 남부여대하고 피난을 가게 되었다. 한참을 가다가 문중의 한 어른이 족보를 빠뜨리고 온 것을 알게 되었다. 급히 문중 회의를 열었으나 걱정만 할 뿐 뾰쪽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마을엔 왜구들이 들어 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때 옆에서 듣고만 있던 하인인 할멈이 자기가 가겠다고 하며 나섰다. 할멈은 동네에 돌아와서 족보는 찾았으나 이미 마을에는 왜구가 들어 와 있어서 앞에 간 일행과는 합류할 수가 없었다.
해서 마을 옆에 있는 주치봉에 들어 가 석굴에 숨어 있었다. 숨어 지내면서 먹을 식량이 없어 주변에 있는 열매를 따 먹으며 연명했다. 그러다 왜구가 물러간 후 문중 사람들이 들어 와 주치봉 석굴에 들어가 살피니 종 할멈의 가슴에는 족보가 안겨져 있었으나 종 할멈은 이미 죽은 뒤였다. 후에 문중에서는 종 할멈의 죽음을 가상히 여겨 그 시체를 문중의 선산에 묻고 제사를 지내며 충성스러운 종의 넋을 기렸다. 예전에는 종 할머니 제사를 음력 10월 16일 마을에서 모셨으나 현재는 월선리에 있는 문중 재각에서 다른 선조들과 함께 제사를 모신다.
이 마을에는 우암 송시열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다. 주치봉 자락에 있었던 창주사가 그것이다. 창주사는 류 운 공의 손자인 창주처사 柳梯(자-雲路, 호-滄洲處士. 1652-1727) 공이 1704년에 세운 사당이다. 이 사당은 우암 송시열선생이 화설당에서 기거하다 가신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긴 이 지방 선비들의 논의에 의하여 세워졌다. 우암과 주자학과의 관계를 중요시하여 주자를 주벽으로 모시고 우암선생을 배향하여 하마비를 세웠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모두 폐허가 되고 지금은 이름만 전할 뿐이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일본제국시대에 없어졌다고 한다. 창주처사는 우암 송시열 선생을 사숙하고 흠모했던 선비였다.
花溪亭이 있다. 화계거사 류기순의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정자 내에는 화계정기 등 10여개의 편액이 걸려있다. 후손인 재업이 1951년 신묘년에 중건했다. 화계거사는 당시에 문명이 높았으며 부귀를 뜬구름같이 여기고 선조인 화설당공과 청계공을 사모하여 이 두 사람의 글자를 하나씩 따서 화계정이라 이름 짓고 숭배하였다고 한다.
동학 때 집강소가 있었던 청천리가 바로 앞에 있는 마을이어서 주민들 중에 동학과 관련된 사람이 있는가 물어보았더니 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柳在得으로 현재 마을에는 그의 손부가 살고 있으나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재득은 인물이 걸출하고 힘이 세 주변에서 함부로 할 수 없었으며 동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고 한다. 동학인 진정된 후 헌병대에 잡혀 가 곤욕을 치뤘다고 한다.
지금은 농작물 시험장 속에 있지만 예전에는 주민들이 배를 매기도 하고 당산제를 지내기도 하였던 입석이 있다. 입석은 석주형으로 당산나무에 박혀있는데 마을에서는 선독, 막음독, 앞당산, 하네당산 등으로 부르고 있다. 입석은 자연석으로 사람이 서있는 형태를 하고 있으며 높이 170, 둘레 32센티미터의 크기다. 마을에서는 몇 년에 한 번씩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낸다. 한때는 이 마을이 광-목간 도로 주변마을 중에서 가장 기와집이 많았던 마을이기도 했다.
광목간 길 건너에 2개의 효열각이 있다. 효자류재성비와 열부이천서씨비를 각각 세운 효열각과 효열부무안박씨비가 있는 효열각이 있다. 마을회관 옆에는 유호풍표성비(2004년)가 있으며 화계정 안에 남계유공효행비와 후계유공선행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