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1리 인동마을
- 작성일
- 2016.08.22 14:25
- 등록자
- 홍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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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대목과 3뫼를 안고 있는 마을 - 용산1리 인동마을
인동 마을은 일로읍에서 몽탄 방면으로 1㎞ 가량 가면 나오는 마을로, 마을 앞으로는 811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행정 구역명으로는 일로읍 용산1리로 이 마을뿐 아니라 왕뫼, 연지원, 송암을 포함하고 있으며 해주 오씨 집성촌이었다.
마을유래지에 따르면 ‘인동’이란 마을 이름의 유래는 ‘마을 뒷산이 용의 형상이고 마을 앞 우물에서 용이 승천하니 주위의 어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하여 이름 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호구총수에는 인동이란 이름이 나오지 않고 일제강점기의 자료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해주 오씨 대동보나 각종 무덤의 묘비 등에는 한결같이 이 마을의 이름을 용연동(龍淵洞)이라 기록하고 있다. 즉 마을에 있는 용샘을 지칭하여 붙인 이름이다. 주민들도 언제부터 현재의 이름으로 불려 졌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선조들이 용연동이라는 지명을 사용했다는 말을 듣고는 대체로 긍정 하는 모습이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해주오씨 오한규(1734-1797. 호-성재)이다. 입향 연도는 1700년대 후반으로 해주 오씨 대동보에 따르면 ‘입향조는 1748년에 의금부 도사의 교지를 받고 활동하다 이후에 종3품인 증직대부로 승진하면서 관직을 버리고 남악에서 이 마을로 들어왔다’고 적혀 있다.
자연에 뜻을 두어 살기 좋은 곳
무안에 해주오씨가 처음 들어온 것은 1600년대 초로, 호조참판을 지낸 오숙기(호-청재)가 자연을 찾아 삼향면 남악에 자리를 잡으면서 부터다. 그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으나 임란이 평정되자 벼슬을 버리고, 자연에 뜻을 두어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곳으로 내려 와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후 그는 ‘세간의 득실을 마음에 두지 않고 효우, 문행으로 세월을 보냈다’ 한다.
그로부터 6대에 해당되는 오 한규가 벼슬살이를 하다가 남악에서 분가하여 이 마을에 들어온 것이다, 지금도 마을에 있는 해주오씨 사인공파 종가에는 입향조가 받은 의금부 도사 교지를 비롯, 오세기(吳世麒-오동룡 전 마을노인회장의 조부)의 함경북도 관찰도주사에 임관한다는 광무10년(1906년)에 발행한 교지와 그외 문중의 어른들이 받은 성균관 박사 교지 마패 등 각종 문서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 마을은 3뫼를 안고 있다. 마을의 주산인 복개산(일명 대통산)의 맥을 받은 첫 뫼가 왕뫼이다. 그리고 마을 앞 송암 옆의 딴뫼와 산정리의 방뫼가 두 번째 세 번째에 해당된다. ‘예전에는 왕뫼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다’고 한다. 해서 복개산의 형상이 물가에 엎드린 용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용산리라 했다.
그러나 바닷물이 들어 왔다는 흔적이 없어 긴가민가 하고 있었는데 전임 마을 이장이 왕뫼에서 샘을 팔 때 조금 깊게 파내려가니 뻘흙과 배의 조각으로 여겨지는 판자 그리고 각종 조개 껍질 등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또한 해변가 주변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이 왕뫼에 많이 있는 것을 봤을 때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왔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왕뫼에는 나주 정씨 제각인 금산재가 있다. 예전에 복개산의 정상에는 추석 등 명절 때에는 객지에 나가 있거나 출가를 하였던 인근 마을 사람들이 올라와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성균진사 배출을 기념하는 솔대목
마을 앞 들 가운데에는 용샘[龍淵]이 있다. 이 샘은 마을의 주택과 떨어져 있는데 67년 68년 大旱害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계속 흘러 넘쳤던 유명한 샘이다. 또한 이 샘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인근에서 보기 드문 좋은 샘으로 알려졌다. 현재도 손을 넣으면 시릴 정도로 맑고 깨끗한 물이 콸콸 솟구쳐 올라 흐르고 있었다. 샘 주변에는 유기농 농사의 결과이듯이 크고 작은 우렁이들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마을 앞에 솔대목의 터가 있다. 이 마을에서 성균 진사가 배출되었음을 기념하여 마을 주민들이 기념물을 세워 두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서 터가 없어져 현재는 감나무가 심어져 있는 밭이 되었다. 주인공은 해주오씨 오 복근으로 조선조 말에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이 지역에서는 드물게 성균 진사가 되었던 사람이다. 그가 성균박사가 되어 내려 올 때는 그를 보려고 인근의 마을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집이 무너졌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주민들 사이에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마을은 일로에서 일등 가는 마을이다. 터가 좋아 인물이 많이 나오고 재물이 넉넉하니 인심이 좋고 후손들이 잘 되니 조상들의 은덕이 깊어 주변 마을에서 부러워하는 마을이다. 또한 샘이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었으며 풍수상으로 길지에 자리 잡고 있어 사사로운 잡기가 가까이 하지 못해 커다란 변고를 겪지 않았던 마을이기도 하다.
마을회관 건립 때, 다른 마을에서는 전부 郡의 보조를 받아 지었으나 이 마을에서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 세웠다. 회관 자리에는 아름드리의 구수나무 당목이 있었으나 오래 전에 말라 죽었다.
예전에 이 마을이 영산강 해변가에 해당되었음을 증명하듯이 많은 지석묘가 남아 있다. 왕뫼에 9기가 있으며, 해주오씨 문중 산인 안산에는 13기의 고인돌이 있다. 또한 송암 마을에도 고인돌이 있어 인동마을을 둘러싸고 고인돌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예전에는 더 많은 지석묘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안산에는 해주오씨의 제각인 永思齋가 있다.
내고장 전통가꾸기나 마을유래지에는 이 마을에 ‘밀양박씨열행비’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주민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남아있는 이름으로 경주이씨 제각을 말하는 산당이 있고 구장터 가는 길인 장질이 있으며 그리고 마을 곳곳에 박하샘과 쌍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