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2리 방뫼마을
- 작성일
- 2016.08.22 14:40
- 등록자
- 홍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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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마을이 모여서 이루어진 마을- 산정2리 방뫼마을
방매는 산정 2리에 속한 마을로 방매 학두리 당사촌 동매 잿등 비와등 화산동 핑핑(병풍) 수퉁목 서당동 등의 10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이중 현재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은 방매 학두리 당사촌 동매 잿등 화산동 등 6개 마을에 해당된다.
산정2리의 중심 마을인 방매는 매화가 많이 피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근래에 와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의 이름이 처음 기록으로 나올 때는 조선시대가 아닌 일제강점기인 1912년이다. 그때의 이름은 防山동이었으며 1917년에도 防山동으로 나온다. 防山을 우리말로 부른 것이 방뫼다. 그러다 1987년의 자료에서는 현재의 이름인 芳梅로 나온다.
주민들은 이렇게 지명이 변하게 된 이유를 매화나무가 많이 있어서 또는 풍수적으로 매화낙지의 지형이어서 바꿨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매화나무가 없었을 뿐 아니라 주변 마을에서는 일로의 3뫼 중의 한 마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용산리 인동 마을의 왕뫼, 산정리 입구의 딴뫼 그리고 이 마을을 방뫼라 하여 3뫼로 부르는 것이다.
학두리는 이웃마을인 상신기리의 환학동과 관련이 있는 마을로 지형이 학의 머리에 해당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날아오던 암수 두 마리의 학이 환학동 마을을 지나면서 풍광이 수려해 수컷 학은 환학동에 주저앉고 암컷 학은 학두리에 머물며 살았다. 두 마리의 학은 서로를 바라보며 오가면서 행복하게 살았는데 학두리 마을의 학이 마치 환학동 마을의 학을 찾아 머리를 들어 바라보는 형국의 지형이다.
당사촌은 원래 당산나무가 있었던 마을로 당산촌으로 불렸는데 주민들이 선비가 사는 마을의 이름인 당사촌으로 부르는 게 좋겠다 하여 바꿔 부르는 이름이다. 飛蛾등은 벌레가 날아다니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꽃이 있으면 날아드는 벌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의미로 쓰여진 것이다. 비화등 또는 비학등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冬梅는 방매 앞에 있는 마을이다. 화산동은 꽃뫼 마을인데 일로로 가는 큰 길이 있어 한때는 주막이 있기도 했다.
문헌으로 산정2리에 속한 마을 이름의 변화를 보면 방매는 제일 나중에 형성된 마을로 보인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노촌면 鶴頭리와 堂山리 그리고 花山리만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일로면 堂山촌 防山동 서당동 학두리 등으로 기록되었다. 1917년에는 일로면 산정리 防山동 당산촌 학두리 등으로 나오고 1987년엔 일로읍 산정2리 芳梅만 나온다.
기부문화가 정착된 마을
이 마을의 입향조는 뚜렷하지가 않다. 주민들의 의견도 일치하지 않는다. 300여 년 전에 형성되었다고도 하고 마을이 들어선지 200년이 못된다고도 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항으로 보아 조선조 말 무렵에 김해김씨와 밀양박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호구총수에 나오는 당산촌이나 학두리 화산동 마을에는 주민들이 별로 거주하지 않아 확인할 수는 없다.
마을 앞을 구언장이라 하는데 예전에는 광암 상신기 마을 앞까지 영산강 물이 들어갔다. 지금의 농지가 조성된 것은 조선시대에 세 차례의 간척을 통해서 형성한 것이다. 처음에는 사교 앞 마을에서 학두리까지 1차 제방을 쌓고 2차는 복룡촌에서 용호동까지, 3차는 양호도에서 선창목까지 둑을 쌓으면서 현재의 넓은 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막아진 마을 앞 둑은 수통목에서 비롯되었는데 그때 되어서야 조그마한 농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수통목은 포구 역할을 해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 주막도 있었다.
방매 마을 앞 광장에 두 개의 표지석이 있다. 하나는 학마당이라 쓰여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순례여사선적비이다. 학마당은 학두리에 사는 주민 임병길(호-松鶴)씨가 135평의 광장 부지를 마을에 희사했는데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표지석이다.
이순례여사선적비는 이 마을이 고향인 이순례 여사가 마을 앞에 동각을 세우고 마을에 토지를 희사한 것에 대한 주민들의 보답에서 세운 비다. 사실 후손이 없었던 이 여사는 자신의 전 재산을 마을에 맡기면서 주민들에게 자신이 죽은 날에 제사를 당부하였다. 지금도 매년 이여사의 제삿날이 되면 주민 모두가 모여 이 여사를 회상하고 그의 고향사랑의 정신을 기리기도 한다.
이 마을에는 행복택시가 다닌다. 이 마을은 버스가 다니지 않는 오지마을로서 일로읍에서는 지장리 청금성 마을에 주민 복지 차원에서 군에서 행복택시를 운영하는 것이다.
이 마을에는 중심 성씨가 없이 여러 성씨가 함께 살고 있지만 서로 협조하고 양보하여 화목한 생활을 가꾸고 있다. 특히 혼란기인 한국전쟁 때도 전쟁 발발 전 3명의 희생자 외엔 한 명도 피해자가 없을 정도로 마을 분위기가 좋다. 이 마을의 주된 소득원은 시금치와 담배 농사이다. 주민들은 사계절 중 농한기가 없을 정도로 바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주민들은 영산강 둑을 고맙게 여기고 있다. 왜냐하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일로에는 큰 산이 없어 물을 가둘 수 있는 저수지가 없다. 해서 1967년도 대 한해 때 이 마을을 포함한 주변 마을 주민들이 대단히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이대로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 없어질 것이라고까지 했다. 주민들에게 물은 그만큼 절절한 대상이다. 그런데 영산강을 막고 농업용수로 물을 얼마든지 쓸 수 있게 되자 가뭄의 고통에서 해방 된 것이다.
마을 주변에 고인돌이 많다. 서당동에 2개의 고인돌이 있고 학두리 뒷산에 1개가 있다. 그리고 잿등에는 2개의 고인돌이 있었으나 길을 넓히면서 없어졌다. 마을에 보건지소와 성령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학두리 마을에는 1928년에 세운 가암거사 임조석시혜기념비가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