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암1리 광암마을
- 작성일
- 2016.08.22 15:02
- 등록자
- 홍OO
- 조회수
-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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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촌인들이 오고 싶어하는 마을 - 광암1리 광암마을
광암은 광암1리에 속하는 마을로 마을 뒷산에 넓은 바위가 있어 주민들은 이 바위에서 마을일을 의논하고 흥겹게 놀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은 매봉산줄기를 배경으로 하여 상광암, 하광암, 청운동(천동이라고도 부름)으로 이루어졌다. 상광암에는 이천서씨와 밀양박씨가 하광암과 청운동에는 나주임씨가 주로 살고 있다. 또한 마을 형성 당시에 마을에서 마주 보이는 월출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마을 앞에 샘을 파 비보하기도 하였으나 현재에는 지하수 개발로 샘이 없고 그 자리에 마을회관이 들어서 있다.
문헌으로 지명의 변천을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노촌면 廣巖으로 나온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의 자료에는 일로면 光岩으로 1917년의 자료에는 일로면 광암리 光岩으로 표기되었다. 1987년의 자료에도 일로읍 광암리 光岩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 지명은 잘못된 표기이다. 광암이라 한 것은 마을 주변에 놓여있는 고인돌 때문이다. 고인돌이 많기도 하지만 하나하나가 굉장히 크고 넓다. 해서 조선시대 표기인 廣巖으로 해야 맞다.
입향유래나 마을의 형성과 관련된 사실은 자세하지 않지만 주민들은 처음에 인동장씨가 살았으며 그 후에 여양진씨와 전주이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마을에는 장씨와 진씨 이씨에 관련된 흔적들이 남아있다. 이어 현재 살고 있는 나주임씨, 이천서씨, 밀양박씨 등이 차례로 들어왔다.
나주 임씨 입향조는 임타(林㙐. 자-實之, 호-夢村. 1593년(선조26)∼1664년(현종5)이다. 공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承旨공 林鵬의 증손이자, 楓巖공 林復의 손자이다. 또한 취련당 동리공 임위의 친형이다. 어렸을 때에 권비(權鞞)에게 수학하였고 천성이 어질고 재주가 뛰어나서 湖南 제일의 인물로 당시 이름이 높았다. 1618년(광해군 10) 戊午式年司馬試에 생원 3등‧진사 2등으로 합격한 후 사섬시주부가 되었다. 이후 仁祖反正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이 되었으며 금오랑의금부도사(金吾郞義禁府都事)를 제수 받았다. 그 후 태인현감 ‧ 군기시주부 ‧ 칠곡부사 ‧ 서산군수 ‧ 이천부사 ‧ 상주목사를 역임하였다. 말년에는 일로 복용리에 관해정을 짓고 유유자적 하였다.
이천서씨 입향조는 서상지(徐尙智. 자-汝泰, 호-淵峰. 1633-1669)이다. 공은 몽탄면 대치리에서 이 마을로 이주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났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다. 또한 학문이 깊어 주변에서 ‘선생’이라 부르며 존경했다.
또한 입향시조와 성씨자료에는 이 마을 밀양 박씨 입향조로 박상진(朴商鎭, 자-명수. 순조 代 사람)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나주 삼도면에서 세거하다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곳으로 왔다. 자료에서 ‘공은 문장이 화려하고 지절이 고상하여 청운의 계획을 일삼지 아니하고 향리의 자제들을 가르치며 이단에 유혹되지 아니하고 세상을 은거하며 마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에게는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같은 마을로 淸雲洞(靑雲洞)이 있다. 지명의 유래는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바다 안개가 마치 구름과 같은 형상이 되어 피어오른다 하여 청운동이라 하였다’ 한다. 임씨들이 광암 마을에서 분가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얼마 전까지 마을에 삼향면 유교리의 나상옥과 비교되는 임성택이라는 천석꾼이 살았다. 주변사람들이 공의 땅을 밟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답을 가지고 있었는데 공의 집에는 네 개의 문이 있을 정도로 넓고 규모가 컸다. 그러나 그 웅장했던 古家는 주인이 바뀌는 과정에서 헐리고 파괴되거나 부분적으로 매각되었고 현재는 6칸의 본채와 부엌방 부분만 폐허로 남아있다. 해방 이후 임성택은 대부분 재산을 잃지만 목포에서 양조장을 경영하며 재기를 노렸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자제들은 훌륭하게 성장하여 국가의 동량이 되었다.
이 마을에는 예부터 전해져 오는 명당이 있다. 반점이라고 부르는 혈처인데 아직까지 정확한 곳을 모르고 있다. 일부 주민들은 천석꾼 집 뒤의 장독 근처가 반점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나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시골 마을치고는 드물게 짜임새 있는 마을
마을의 지형이 남향의 소쿠리 형으로 아늑한 느낌을 준다. 영산강 둑이 막히기 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지형이다.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마을 주변에는 지석묘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노루바윗재라 부르는 미곡처리장 주변에 12기의 지석묘와 바윗재라 부르는 인동장씨 민묘 주변에 9기의 지석묘가 있다. 또한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한 자료를 보면 마을 뒤 밀양박씨 선산에 6기의 지석묘를 확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잡목이 우거져 있어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중에서 큰 지석묘는 길이가 4미터 70이 되는 것도 있다. 또한 그 지석묘 위에는 선사시대인들이 별자리를 관측하던 흔적으로 보이는 구멍들이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마을 주변의 등성이에는 고총(古冢)들이 흩어져 있어 가끔 경운기가 빠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특히 마을 뒤의 밭에서는 빗살무늬 토기를 비롯하여 화살촉, 돌도끼, 접시 그리고 특이한 형태의 기왓 조각 등이 많이 발굴되었다. 마을에서는 이렇게 발굴된 각종 유물들을 마을에 있는 일로동초등학교에 보관하여 아이들 교육용으로 전시하여 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유물들이 도난당했거나 소실되어 현재는 보잘 것 없는 유물들만 전시되어 있다.
특히 30여년 전에 한 지역주민이 토기를 발견하여 목포대에 신고한 일이 있었다. 당시 목포대에서는 귀한 유물을 발굴했다하여 기뻐하며 잠시 연구용으로 보관하겠다며 가져가서는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고 한다.
마을에 있는 일로동초등학교는 처음 환학동에서 시작하여 1946년에 용산리 농장마을에서 일로남국교로 개칭한 뒤, 1957년에 현재의 자리에서 일로동국교로 그리고 얼마 전에 일로동초등학교로 개칭했다.
마을에 광암정사라는 6칸 접집이 있다. 광주에서 사업을 하다 나이가 들어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임춘기씨 집이다. 임춘기씨는 집 앞에 광암문화관이라는 개인 전시실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 안에는 평소에 수집하였던 각종 병풍과 수석 그리고 서화골동품등이 보관되어 있다. 값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귀중한 문화재들인데 개인이 관리하거나 보관하기엔 너무 아까운 생각이 들어 군민이나 일반 애호가들과 공유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마을은 시골 마을치고는 드물게 짜임새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 들어서면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감돈다. 특히 외지인들이 많이 들어와 개성 있는 집들을 지으면서 도시의 한적한 마을과 같은 분위기를 갖게 한다. 또한 보사부차관을 포함하여 많은 정·재계 관련 인사들을 배출하였는데 근래에도 이 마을 출신 자녀들이 각종 고시에 합격하면서 주변 마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해서 시골에서 살기를 희망하는 도시인들이 1순위로 꼽는 살고 싶은 마을이 되기도 한다.
마을 주변에 남아 있는 지명들이 많이 있다. 마을 앞 잔등인 거문고등, 향나무가 있다 해서 상나무(향나무)골이 있으며 예전에 배가 들어왔던 곳을 나타내는 배들이. 방고동, 구수둠벙 등이 있다. 배들이에서는 철로 된 닻을 발견하기도 했다.
또한 청운동 주변을 이문안들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전주이씨들의 문중 들[野]이라는 의미이다. 이 들을 파면 지금도 기와조각들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마을에 흉년이 들었을 때 개떡 한 덩이와 논 한 방구를 바꿨다는 개떡배미, 골짜기가 옥동자처럼 생겼다 해서 옥산골, 장구처럼 생겼다 해서 장구배미 등이 있으며 초분골, 개들, 금태(석정)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마을에는 일로동부교회 미곡처리장 요양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