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암2리 등림마을
- 작성일
- 2016.08.22 15:08
- 등록자
- 홍OO
- 조회수
- 924
첨부파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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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당 빚이 하나도 없는 마을 - 광암2리 등림마을
등림은 광암2리에 속하는 마을로 금태 마을과 같은 행정구역으로 언젠가는 숲으로 올라간다는 지명 유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 유래는 登林이라는 지명의 한자에 맞춰 풀이한 것으로 보인다. 마을유래지에서는 ‘마을 뒷산에 숲이 우거져 있어 이곳에서 마을 어른들이 모여 자주 마을일을 의논하며 여러 성씨가 의좋게 지내므로 마을 이름을 등림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 마을이 등잔에 불을 켜놓은 것같이 생겼다 하여 등림이라고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마을회관 앞 표지석에도 ‘이웃 마을에서 보기에 숲속에 등잔불이 켜 있는 것 같이 보인다 하여 등림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다른 의견도 있다. 길 아래 원래의 마을에서 현재의 마을을 봤을 때 푸른 숲 위에 형성된 마을이어서 등림이라 했다고 말하는 분도 있다.
이 마을은 나주정씨 집성촌을 이뤘는데 산정리에서 살던 정씨가 옆 마을인 금태를 거쳐 이 마을에 정착한 것이 130여 년 전으로 보인다.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려 했으나 족보를 볼 수 없어 정리하지 못했다. 마을유래지에서는 ‘입향유래는 자세하지 않으나 대략 300년 전에 나주 정씨, 여양 진씨 등이 숲이 울창하고 농사 짓기에 알맞은 곳이라 여겨 터를 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회관 앞 표지석에도 400여년 전에 자리를 잡았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었다.
문헌으로 살펴 본 마을의 역사는 짧다. 조선시대 각 마을의 지명을 정리했던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나오지 않는다. 1912년의 자료에 비로소 일로면 等林洞으로, 이어 1917년의 자료에도 일로면 광암리 等林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후 1987년의 자료에는 현재의 한자 표기인 일로읍 광암리 登林으로 나온다.
등림은 매봉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마을의 지형이 쥐가 샘을 찾아 물을 마시러 오는 형국이다. 해서 지금 살고 있는 터도 새암골(새앙쥐골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라 하고 있다.
이 마을은 원래 마을 앞 811번 도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곳에는 세 가구가 살고 있는데 1978년 새마을 사업 중 주택개량 사업의 일환으로 정부 지원을 받아 현재의 자리로 이주한 것이다. 당시 지원금은 200만원으로 전국에서 최초로 취락구조 개선사업을 실시한 것이다. 현재도 등림마을은 주거환경 개선의 새마을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하는데 모범적으로 시행한 마을로 알려졌다.
당시 새터라 불리던 현재의 자리에 16가구가 이주했는데 당시의 세대수가 지금도 변하지 않고 16가구를 유지하고 있다. 집의 구조도 18평과 20평이었는데 당시 주민들이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던지 200만원의 융자금을 생전에 갚을 수 있을까 염려할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융자금도 다 갚고 가구당 빚이 없는 마을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전국에서 최초로 취락구조 개선 사업을 실시
811번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 좌우에 효열각이 있다. 하나는 1935년에 세운 함평이씨열부비각이다. 이씨는 어려서부터 효순한 성품으로 규문의 덕을 쌓았다. 정한교(초명-泰漢, 자-敬汝. 1838-1898)에게 출가 와서는 시부모를 정성으로 모시고 먹고 싶은 음식이 있다하면 어떻게든 구해드리고 마음을 편하게 해드렸다. 시집 온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이 병에 걸려 자리에 눕자 후원에 단을 쌓고 밤마다 목욕재계하며 낫기를 기원했다. 남편 사후에도 시부모를 정성스럽게 모셨으며 아들 교육에도 혼신의 힘을 다했다. 손자 광섭(1908-1992. 자-정수, 호-임헌)이 후일 이런 할머니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또 하나는 풍천임씨효열비각이다. 임씨는 정기백 처로 그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1977년 세웠다. 또한 아직 비각이나 효열문은 세우지 않았으나 3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시부모를 극진히 모셔 효부상을 받은 사람도 현재 거주하고 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때 일로 제일의 농악을 자랑한 농악대가 있었다. 원래 일로 농장 마을의 농악을 알아주기는 하나 이 마을에 미치지는 못한다고 한다. 특히 주민들은 이 농악대의 노력으로 광암 마을의 일로 동 초등학교 설립 비용을 마련한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당시에 일주일 동안 농악대가 마을마다 다니면서 설립 비용을 마련한 것이다.
마을 앞 구길 주변에 고인돌이 있다. 바윗등이라 부르는 곳에 9개의 고인돌이 있는데 원래는 도로 양측에 20여기가 있었으나 농업진흥공사 현장사업소가 들어서면서 11기의 지석묘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가장 큰 지석묘의 형태는 장방형이며 길이 310 × 220의 규모이다. 또한 검바위산에는 2기의 고인돌이 놓여있는데 산 자체가 커다란 돌덩어리이다. 진사동을 제외한 광암리 주변에는 수십 기의 고인돌이 산재해 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복개산 간대골 연지나무골 검바윗골(검밧골) 너릿바웃재 배다리 등의 이름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