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신기1리 상신마을
- 작성일
- 2016.08.22 15:21
- 등록자
- 홍OO
- 조회수
- 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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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동에서 시작한 새터 마을 - 상신기1리 상신 마을
상신 마을은 상신기1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처음 마을이 형성될 때는 白蓮洞이라 불렀다. 당시 새터골이라 부르는 백련동 터에 해당하는 부분은 산정농공단지 앞 사거리에서 백련로로 향하는 바로 아래 부분이다. 이곳에서 마을이 시작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지명이 상신기리가 되었다.
문헌에 나타나 있는 지명의 변천을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군 노촌면 백련동으로, 1912년의 지방행정구역일람에는 일로면 상신기동으로, 1917년 조선면리동 일람에는 일로면 상신기리 상신기로 그리고 현재에 들어서는 일로읍 상신기리 상신 마을로 변했다. 해서 현재의 명칭은 일제강점기 때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인동 장씨와 경주 정씨 그리고 무안 박씨이다. 이중 먼저 들어온 성씨는 인동 장씨라 하나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무안박씨 입향조는 확인할 수 있었다. 박동교(1665-1749. 자-인초, 호-죽은)는 청룡리 오갈재에서 거주하다 이 마을로 옮겼다.
마을은 東山(이 산의 명칭은 백련동에서 봤을 때 동쪽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동산의 맞은편에 마을이 있기 때문에 西山에 해당된다)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풍수적 지형이 조리형으로 선무덤(솔무더기라 불렀다), 두리봉, 서당골, 뒷재(파군교로 넘어가는 재), 갱애, 여승(여자중의 형국), 허퉁우리, 점등(현재의 영화주유소 주변)으로 둘러 싸여 있다.
여기서 허퉁우리는 현재 산정 농공단지가 있는 자리인데 도강김씨 터였다. 예전에 초분골이어서 형국이 둥우리는 둥우리인데 빈 둥우리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돌칼을 비롯하여 화살촉 고리형옥반지 주전자 등을 발견하였는데 공공기관이 아닌 주민 개개인들이 발견해 정리가 되지 않았다.
마을 주변에는 당산하네와 당산할멈의 선돌이 있어 마을이 번성했을 때는 마을의 안녕과 더불어 한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현재는 마을 청년회를 중심으로 선돌 주변 정화사업을 벌이고 있다. 천방둑이 막히기 전까지는 바로 마을 앞까지 물이 들어왔었다. 해서 지금도 구수둠벙이라는 웅덩이 자리가 있고 당산나무가 해풍을 막아주었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송별잔등이 있는 마을
예전에 장문터라 불리는 마을 앞에 인동장씨 열녀각이 있었다.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간 남편이 급사하자 부인이 한양까지 걸어서 올라가 시신을 모셔왔는데 모셔오는 과정이 예사롭지 않아 나라에서 내린 정려이다. 부인은 남편의 시신을 머리에 이고 내려오면서 쉴 때마다 시신 앞에 상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 보는 사람이면 모두 감탄을 하며 부인의 지극함을 칭송했다고 한다. 하여 이런 소문이 나라에 까지 알려져 나라에서 내려준 열녀각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신안군 압해도에 있는 친족들이 가져가 버려 주민들에게는 장씨부인의 지극한 열녀행만 전해져 내려올 뿐이다.
60년대 이 마을은 새마을운동으로 일로읍에서 제일 앞서가는 마을이었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 그때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 주민들은 당시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마을 뒤 인동장씨 선산에 ‘새주이’란 잔등이 있다. 주민들은 송별잔등이라고도 부르는데 군대 가는 아들이 떠날 때 온 주민들이 나와서 손을 흔들어주던 잔등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을 거친 후이기 때문에 당시에 군대에 가는 것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비장함을 간직한 거사(?)였다. 해서 ‘꼭 살아서 오라’는 당부와 함께 손을 흔들며 전송을 하면서 일로역까지 가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마을에는 공동상여가 있다. 마을 주민들 중 객지에 나간 향우들이 성금을 모아 마을에 기증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마을은 주민들 중 상을 만났을 때는 객지에 나간 이 마을 후손들이 모두 상주가 되어 내려와서 슬픔을 같이 나눈다고 한다.
마을 뒤 동산에 두 개의 말무덤이 있다. 말묏등이라 부르기도 하는 이곳은 둘레가 2미터 40이 넘는 큰 소나무 주변에 있는 무덤으로 예전에는 주민들의 놀이터가 되었던 곳이다. 지금은 말무덤 주변에 여러 성씨들의 무덤들이 들어서 있어 망자들의 휴식처가 되어있다. 고인돌도 2기나 있었다.
일로에서는 드물게 동학의 흔적을 발견하였다. 일로 산정농공단지 주변에 있는 영화 주유소 맞은편이 가산재인데 주민들은 ‘동학 때 가산 난리가 있었다’고 알 정도로 큰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주민들 중 동촌양반(김해김씨)이 관군에게 끌려가서 몹시 맞았다는 사실도 대부분의 주민들이 알고 있었다. 이것은 몽탄에서 활약하던 동학군이 삼향의 대월리로 가면서 추격하는 관군들과 부딪히면서 일어난 사건으로 보인다.
마을 앞에 시멘트로 단장되어 있는 샘은 한때 KBS 상신 방송국이라 불렸다. 마을의 모든 소식이 이곳에서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또한 이 샘은 한때 400여명이 넘는 대 식구가 사용했던 곳이어서 아침이면 물 뜨러 오는 사람들로 장이 서기도 했다.
마을 뒤 동산에는 지석묘군이 있었다. 김해김씨 세장산에 해당되는 이곳에서 목포대학교 박물관이 조사한 자료에는 10개의 지석묘가 발견되었다고 하나 주민들은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고 또한 수풀이 우거져 있어 찾기가 어려웠다. 확인할 수 있는 지석묘는 7개였다.
마을회관 앞 표지석에는 ‘성실, 노력, 검소’라는 글이 새겨져 있으며 남아있는 지명으로 구수둠벙거리, 새터골, 점지난등(점등을 지나는 등), 뒷등, 백련동 주변의 봉수동, 점등 밑의 낡은 동 등이 남아 있다. 또한 한국지명총람에는 마을 앞에 있는 내가 구불구불하게 생겼다 해서 곱은 똘이라 했고, 그곳에 있는 둠벙을 한새둠벙이라 했다 하는 데 확인할 수 없었다. 마을에 2012년에 세운 ‘효우당정공기적비’와 2003년에 세운 ‘후헌정달종선행추모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