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신기3리 중촌마을
- 작성일
- 2016.08.22 15:33
- 등록자
- 홍OO
- 조회수
- 843
첨부파일(6)
-
이미지 상신리 중촌1.JPG
349 hit/ 3.85 MB
-
이미지 중촌2.JPG
315 hit/ 4.25 MB
-
이미지 중촌3.JPG
302 hit/ 3.37 MB
-
이미지 중촌5.JPG
299 hit/ 3.47 MB
-
이미지 중촌6.JPG
331 hit/ 3.30 MB
-
이미지 중촌7.JPG
298 hit/ 3.98 MB
들 가운데 세워진 마을 - 상신기3리 중촌마을
중촌은 상신기 3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원래 상신기 2리인 환학동과 같은 행정구역이었으나 몇 년 전에 신정동과 함께 상신기 3리로 분리되었다. 중촌은 들 가운데 마을이 형성되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한자도 中村으로 표기한다. 상신기와 신정동 마을의 중간에 있다 해서 중촌이라 이름을 지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마을유래지나 주민들은 마을 이름을 한자로 仲村으로 쓰고 있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아는 사람이 없고 예전부터 써 왔기 때문에 그대로 쓰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지명의 유래도 물론 알고 있지 않았다.
한 주민은 ‘中川’이라 부르지 않았을까 추정하기도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마을 옆으로 농공단지 진사동 등에서 모여진 물이 내[川]가 되어 흐르는 하천이 있기 때문이다. 마을 입구 표지석에는 ‘중천’이라 표기되어 있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군 老村面 中村으로 나온다. 그리고 장흥고씨 족보나 다른 자료에도 中村으로 나온다. 1912년의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나오지 않다가 1917년의 조선면리동일람에도 일로면 상신기리에 용교리 신흥리 환학동 상신기가 나오나 중촌이나 신정동의 마을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이 마을은 다산로를 사이에 두고 복룡리 사교 마을과 마주하고 있다. 마을 앞에 형성되어 있는 농경지는 간척으로 조성된 들이다. 지금은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구 수가 많아 처음 온 일꾼들이 주인 집을 찾을 때는 소의 뒤를 쫒아가며 찾았다고 한다.
이 마을은 처음 경주김씨가 들어와 살았으나 현재는 한 세대도 남아있지 않고 마을 주변에 흔적들만 남아 있다. 이후 들어 온 성씨가 장흥고씨로 입향조는 고 준(자 - 제원, 호 - 樂窩. 1742 - 1806)이 1700년대 후반에 이 마을에 정착한 것으로 여겨진다. 해서 얼마 전까지 고씨 집성촌이었으나 현재는 여러 성씨가 사는 복합성씨의 마을이다.
고 준은 효자로 신정동 마을 입구에 있는 효자고공유허비의 주인공으로 효행이 뛰어나 10세에 아버지의 병환에 斷指引血로 5일을 연명케 하였을 뿐 아니라 육순의 어머니 상을 당하여서는 심히 슬퍼하여 몸이 상하기도 하였다. 또한 상규를 벗어난 삼년상을 치루기도 해 후일 進士 林基洙가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한 추천장을 작성하여 효행을 널리 알렸다.
마을 오른쪽에 당산이라 부르는 언덕이 있다. 이곳은 환학동의 이천서씨 무덤이 있는 자리이며 주변에 수령이 상당히 되어 보이는 소나무 6그루가 자라고 있다. 5 - 6년 전까지 환학동 서씨들이 이곳에서 해년마다 제사를 지냈으나 현재는 지내지 않고 있다. 이후 묘 관리는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하고 있다. 마을의 주 소득원은 잎담배와 고추 등 특용작물이다. 주민들이 서로 돕는 협동심이 강하며 친환경 마을로 선정되기도 했다.
같은 행정구역의 신정동은 新亭洞으로 쓰기도 하고 新井洞으로 쓰기도 한다. 마을 대부분이 한옥으로 이루어졌다. 국가의 정책에 발맞춰 정부의 도움으로 한옥단지를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마을 뒤에 서당뫼라 부르는 산이 있는데 그 기슭에 불광사라는 절이 있다. 주지인 박홍수는 신정동 마을 주민으로 그를 따르는 신도들이 많았다. 특히 서울 등 도시에서 오는 신도가 많았다. 하지만 20여년 전에 주지는 교통사고를 당하여 유명을 달리했다.
퇴락한 불광사가 있어
현재는 관리가 잘 되어 있지 않지만 주변의 상황을 보면 상당한 절세[寺刹勢]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시설로는 4칸 팔작지붕의 법당과 사경각 그리고 살림집이 있다. 절 뒤로 나 있는 시멘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산 정상에는 좌불과 와불이 조성되어 있다. 와불은 길이가 14미터 가 넘을 정도의 규모이다. 비록 바위가 아닌 시멘트로 조성된 것이지만 대단한 공력으로 세웠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절 입구에는 8칸의 재래식 변소와 1동의 창고가 조성되어 있다.
절 밑은 개꿀재라 부른다. 개꿀재는 일본인들이 철도공사를 하는데 주변의 지형으로 보아 바위가 없는 흙만 있는 것으로 알고 공사를 했는데 파고 보니 바위 투성이었다. 바위를 파내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쳤는데 굴은 내지 못하고 주변을 파 협곡을 만들어 철로를 놓았다. 그래서 주민들은 진짜 굴이 있는 재가 아니라 거짓굴의 재라 해서 개꿀재라 했다.
신정동 마을 입구에 ‘효자고공유허비’와 장흥고씨효열비‘등 두 개의 비를 안고 있는 효열각이 있다. 1925년에 세워진 유허비는 입향조인 고 준의 효성을 기록한 비이고 효열비는 고 준의 손자인 고형진 등 4대에 걸친 효자와 열녀가 계승되었음을 추앙하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1936년에 세운 비이다.
내용을 보면 ‘형진은 아버지인 시무가 횡화를 입어 博州에 귀양 가 있을 때 귀양길에서 외로운 혼이 될까 봐 상경하여 목숨을 걸고 애원하니 모두가 그의 효성에 감읍하여 귀양길이 풀리게 되었다. 형진의 큰 아들 제천의 처 김해김씨는 제천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친가에서 지낼 때 남편을 원망치 않았으며 형진의 둘째 손자 은주의 처 경주김씨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늙은 시부모와 젖먹이를 버릴 수 없어 외로운 등불을 지키며 수절을 하였다. 또한 형진의 증손 광의의 처 부안박씨는 시집온 지 3년만에 시어머니를 잃고 30이 못 되 남편이 죽으니 두 아들과 시아버지를 위안하며 가문을 지켰다’는 내용이다.
마을 뒤에 두 개의 고인돌이 있었으나 하나는 없어지고 가옥 안에 있는 고인돌은 남아있다. 마을 앞으로는 남악에서 나주까지 이어지는 도로공사가 진행 중이다. 남아 있는 지명으로 마을 뒤에 초새(촉새)구녁이 있으며 마을 오른쪽에는 구수둠벙이 있다. 몰무덤 갈머리 뒷등 청룡끝도 남아 있다. 또한 마을 앞에 있는 들을 개들이라 하고 골짜기를 수밋골이라 하는데 주민들은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