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서1리 목서마을 - 목관의 서촌 마을
- 작성일
- 2016.08.02 16:19
- 등록자
- 조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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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서 또는 원목서는 목서 1리에 속한 마을로 예전엔 서촌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원래 목북 마을과 행정구역이 같았으나 인구 증가에 따른 1992년 행정구역개편으로 분리되어 현재 목북 마을은 목서5리에 해당한다. 이 마을의 형성 시기는 목내의 다른 마을처럼 자세히 알 수 없다. 단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목관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마을의 형성 시기는 조선조 인조 [仁祖, 1595 - 1649]때에 목관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400여 년 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1789년에 조선왕조에서 발행한 호구총수에도 영광군 망운면 목서촌으로 나온다.
입향조도 알려진 바는 없으나 마을유래지의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을 피해 전주 최씨와 강릉 劉씨, 진주 강씨가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목서 마을 주민들은 여기에 해주오씨를 넣기도 한다.
이 마을에는 천주교 파출소 교회 등이 들어서 있다. 분지형인 이 마을을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삥 둘러싸고 있는데 목성이라 불렀으며 대체적으로 수령이 300여년이 넘는 나무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숲을 이루게 된 동기는 세 가지의 이유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마을의 지형이 나무를 심어야 번창하게 된다는 비보설에 따라 나무를 심게 된 것이고 또 하나는 목내가 여성을 상징하는 모습이어서 숲으로 보호해야 집안이 편안할 수 있다는 풍수설에 영향을 받아 심은 것이다. 세 번째는 말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역할을 하는 울타리였다는 것이다. 해서 나무도 처음엔 대단히 촘촘히 배치됐었다고 한다. 오늘날 망운국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이륙하면서 이곳을 보면 이 목내 촌이 아늑하고 전형적인 전원도시의 이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현재 이러한 나무들 중 상당수가 고사되고 베어졌지만 이 마을을 비롯한 목북의 나무들은 많이 남아있다. 주민들의 관리도 있었겠지만 팽나무가 있는 부지가 개인소유가 아닌 국가의 땅이기 때문에 보호된 측면도 있다. 하지만 목동이나 목남의 나무들은 개인 소유의 땅에 심어졌기에 관리가 소홀해 졌다.
일제강점기 때 망운면 일대는 무안군내 다른 지역보다 일본인들이 많이 이주 해 살았다. 이곳의 지리적 특성을 이용하려는 일본인들에 의해서 압창 포구가 개발되고 1923년에는 이곳 압창과 현경면 동산리간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목화 쌀 등 곡물을 수집하는 조선 흥업회사 사무소가 압창 마을에 설치되고 그것을 보관하는 창고가 세워지면서 일본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통샘은 주민들의 의식 속에 남아있어
또한 일제 말기의 망운비행장 건설과 일본전투기를 보관하기 위한 격납고 설치 등은 자연 일본인들이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무안군에서는 제일 먼저 전기가 들어왔던 지역도 망운이었고 일본인만을 위한 일본인 소학교가 있었던 곳(망운 초 체육관 아래)도 이 지역이었다. 해서 4개면(해제 현경 망운 운남면) 문화의 발상지가 이곳이라 할 만큼 모든 것의 중심지였다.
목관을 둘러싼 네 개의 마을에는 각각 샘이 있었다. 북촌 샘, 동촌 샘 서촌 샘 등으로 불렸는데 이중 서촌의 샘은 통샘이라 부르며 목내에서 잘 알려진 샘이다. 수량이 많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아 주민들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벙어리가 3년만 이 물을 먹으면 말을 할 수 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약효가 뛰어난 물이기도 했다. 새마을 사업 이후 지하수 개발로 물길이 말라 지금은 메워져 있지만 주민들의 의식 속에는 아직도 남아있다. 특히 통샘은 주변의 지리적인 위치와 풍수적인 이유로 조산마을과 함께 비교된다. 즉 통샘은 여자를 가리키고 조산은 남성을 가리키며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목관이 있었던 자리인 망운초등학교에 일본인들을 위한 소학교가 들어서면서 목관의 집채를 뜯어다 이 마을의 공회당을 세울 때 사용하였다. 그런데 목관의 흔적인 아름드리의 나무들이 공회당 자리에 1993년 천주교회가 들어서면서 관리 소홀로 사라져 버려 아쉬움이 크다.
특히 공회당 자리는 망운 중등교육의 시발지였다. 1950년 3월 목북 마을의 이상호씨가 이 자리에 동양대학교 부속 망운중학교를 세웠던 것이다. 이어 1950년 6월 한국전쟁으로 문을 닫았다가 1951년 3월 경문중학교로 다시 개교하여 무안 망운 현경 해제 지역 200여명의 학생이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공회당 자리에 신축하고 있던 학교가 1952년 태풍으로 무너지자 복구하지 못하고 폐교했다. 이어서 고공중학교 성신중학교로 이어졌으나 모두 인가를 받지 못하고 끝났다. 그때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이상호 교장의 공덕비가 망운면사무소 앞에 세워져 있기도 하다.
한국전쟁 때는 마을에 인민군의 파출소인 분주소가 있어서 운남과 운북의 갈등 현장이 되기도 했다. 당시에는 이 마을에 부자들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운남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기도 했는데 초등학교에서는 인민재판이 열려 즉결처분의 처형을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