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서2리 내덕마을 - 쑥당과 유암포가 있었던 덕림의 안 마을
- 작성일
- 2016.08.02 16:22
- 등록자
- 조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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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덕은 목서 2리에 속한 마을로 외덕 마을과 같이 붙어있다. 원래 내덕과 외덕은 한 마을로 德林이라 불렀다. 덕림이란 지명은 마을의 주산인 德雲山에서 비롯되었다. 마을이 형성될 때 입향조가 덕운산 아래에서 터를 닦았기 때문이다. 덕운산은 세항산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김해김씨 조상묘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도 마을 주변에는 소나무들이 많이 보이지만 예전에는 훨씬 많은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다. 해서 마을 이름도 덕운산의 德과 소나무 숲의 林이 만나서 덕림이 되었다.
덕림 마을의 입향조는 홍주 송씨 송필하다. 宋弼夏(1691-1756. 자-여보, 호-德雲庵)는 나주시 금천면 광암리에서 살았으나 뜻을 펴기엔 여의치 않음을 알았다. 해서 좀 더 좋은 환경을 찾아다니다 1700년대 초기에 이 마을을 발견하여 가솔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이곳에 터를 잡은 이후 곧 바로 조그만 초가를 지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서당을 운영하였다. 이런 연유로 처음엔 이 마을을 서당골이라 하였다. 이어서 1700년대 중반에는 나주 광암리에서 함께 살던 청주한씨 韓宗吉(1715-1754. 자-명보, 호-죽계)도 이 마을에 들어왔다.
이어 가솔들이 불어나자 가족의 일부가 1800년대 말에 마을의 아래쪽인 현재의 내덕으로 분가를 하였다. 그러나 이미 이곳에는 김해김씨들이 터를 잡고 있었다(주민인 김정웅씨의 조부가 처음 들어온 것으로 김해김씨 대동보에서 확인). 김해김씨들이 이 마을에 터를 잡은 것은 홍주 송씨보다는 몇 해 앞선 것으로 여겨진다. 주민들은 마을 이름을 덕림의 안쪽이라 하여 내덕이라 하였다. 실지로 1912년 일본인들이 만든 마을 자료를 보면 덕림과 내덕이 표기되어 있다. 이후 1936년에 덕림을 외덕으로 고쳐 현재처럼 내덕과 외덕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마을은 망운면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2㎞ 가량 가면 나온다. 지형이 소 구레 형국으로 뒤에는 덕운산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서해 바다가 있다. 마을 앞으로는 운남 현경간 외곽도로가 지나고 있다. 도로가 나기 전에는 목내가 한눈에 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았으나 길이 나면서 시야가 가려 답답한 느낌을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가까이에 망운국제공항이 있어 소음 피해도 있다.
마을 옆 바다에는 요강섬과 대섬[竹島] 그리고 엄섬이 있다. 요강섬은 조그마한 규모인데 섬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졌으며 마치 요강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섬은 제법 규모가 큰 섬인데 지금도 대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한때는 주민들이 거주하기도 했다.
해안가에 아주 크고 넓었던 바위인 유암포(油岩浦)가 있었다. 기름바위라고도 하는데 이는 이 바위에 고여 있던 물이 바위에 있는 철성분과 만나 흘러내리면서 마치 기름처럼 보인다하여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유암포는 크고 넓었던 이유로 주변 학교의 아이들이 소풍장소로도 널리 알려져 한자로 遊岩浦로 쓰기도 했다. 이 해안에는 일제강점기 때 수송부대를 포함하여 일본군 1개 대대가 주둔하였었다. 이런 연유로 일제강점기 때 이 마을은 망운에서 제일 먼저 전기불 혜택을 받았다.
쑥당과 유암포가 있었던 마을
면소재지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쑥대기 또는 쑥당이라고 부르는 지명이 있다. 주민들은 정확한 지명의 유래를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쑥당이라 불리는 곳을 파 보면 예전의 토기와들이 광범위하게 출토되고 있다. 주민들은 목관이 들어서기 전에 이미 이곳에 官과 관련된 건물이 있었거나 절터가 있었지 않았는가 추정하고 있었다. 참고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애당리(艾堂里)라는 마을이 나온다.
내덕과 외덕 사이에 잔등이 있다. 주민들은 이 잔등이 두 마을 사이에 저울추 역할을 해 균형을 맞춘다고 믿고 있었다. 즉 한쪽이 차면 기울고 또 다른 한쪽이 기울면 차는 그런 구실을 한다고 믿는 것이다.
농촌인구의 급속한 고령화로 때 아니게 득을 보는 사람이 있다. 마을의 어촌계 구성원이다. 예전에는 50여명이 넘는 계원들이 굴양식을 했는데 이제는 일할 수 있는 연령이 4명뿐이다. 해서 50명이 경작했던 뻘 밭을 이제는 4명이서 경작하니 소득을 많이 올릴 수밖에 없다.
이 마을에서도 한국전쟁 때 운남 운북의 갈등으로 세 사람이 죽었다. 희생을 당한 이들은 특별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변에 휩쓸려 그렇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마을 옆 해변가 모래사장(모래추라고도 함)이 좌익과 우익의 싸움터가 된 적도 있었다.
해안도로가 나기 전 마을 주변의 해안가에 아름드리의 말뚝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말뚝의 용도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주민들은 쑥당의 기왓장과 연결시켜 커다란 포구의 흔적이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 해안가의 지형상 큰 개웅이 없고 수심이 깊지 않아 큰 배가 드나들었다고는 볼 수 없다. 추정키엔 토사를 방지하기 위한 목책이 아니었는가 한다.
마을회관 앞에 ‘효열부금성나씨의적비’를 모신 효열각이 있다. 나씨는 25살에 남편을 잃고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하여 주변에서 칭송이 자자했던 열부였다. 두 딸만 두었는데 딸이 그런 어머니의 일생을 장하게 여겨 1995년에 세웠다. 현재 효열각의 주인공은 92세의 나이로 생존해있다. 2000년에는 효열각 안에 비문 해설 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덕운산 뒤 해안도로에는 2기의 비가 있다. 하나는 2010년에 세운 ‘어촌계장송춘성공적비’와 2003년에 세운 ‘죽도5호송덕비’이다. 공적비는 해안도로 개설에 공로가 큰 내용을 담았으며 송덕비의 내용은 1958년 목서어촌조합에서 지은 ‘서해죽도기’에 나온 내용을 기록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가골(각골)이 있었으나 현재는 외곽도로로 편입되어 없어져 버렸다. 또한 마을 앞에는 구수동도 있다. 사람 발자국이 크게 나있는 장수바위가 있었으나 해안도로가 나면서 없어졌다. 독샘 놋깡샘 등 두 개의 샘이 있었다.
목포대학교 박물관의 자료를 보면 마을 북쪽 구릉 정상부에서부터 내덕 앞골로 불리는 곳까지 유물이 넓게 분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적의 서쪽은 서해바다에 접해 있는데 현재 이곳은 대부분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일부 지표면은 계단식 밭으로 인하여 훼손되었다. 유물은 적갈색연질토기편. 회청색경질토기편, 개배편 등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