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서5리 목북마을 - 목관의 북쪽 송전이 있는 마을
- 작성일
- 2016.08.02 16:30
- 등록자
- 조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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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운면은 말을 키우던 목장이 있었던 지역이 아니라 목장을 관할하던 관청인 감목관이 있었던 곳이다. 목관 터는 현재 망운초등학교 체육관이 있는 자리에 있었으며 당시 망운에서 관할했던 목장지는 세 군데로 지금은 모두 신안군에 속해 있는데 자은목장, 장산목장, 압해목장이다. 현재 망운면의 소재지는 예전에 목관 또는 목내라고 부르는 곳을 사등분하여 방위에 따라 목동, 목남, 목서, 목북으로 나누어 부르고 있다. 이 목내를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삥 둘러싸고 있는데 이를 목성이라 부르기도 하며 대체적으로 나무의 수령은 300여년이 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나무로 둘러싸인 소재지는 오목한 분지의 형태로 아늑한 느낌을 주는 지형이다.
망운에서는 제일 높은 지역
이러한 숲을 이루게 된 동기는 두 가지의 이유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마을의 지형이 나무를 심어야 번창하게 된다는 비보설에 따라 나무를 심게 된 것이고 또 하나는 목내가 여성을 상징하는 모습이어서 숲으로 보호해야 집안이 편안할 수 있다는 풍수설에 영향을 받아 심은 것이다.
목서리는 목서, 내덕, 외덕, 장재, 목북, 대곡 등 6개의 자연 마을을 포함하고 있다. 里의 중앙으로는 809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목관의 서쪽에 있다 하여 牧西里라 하였다. 처음엔 영광군 망운면에 속했다가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목북리, 덕림리, 내덕리, 애당리, 대곡리, 장재동, 춘교리 일부를 병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1789년 호구총수에는 영광군 망운면 목북촌으로 나오는 목북 마을은 원래 목서 마을에 속했으나 인구 증가에 따른 1992년 행정구역개편으로 분리되어 현재는 목서5리에 해당한다.
이 마을의 형성 시기는 목내의 다른 마을처럼 자세히 알 수 없다. 단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목관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을의 형성 시기는 조선조 인조 [仁祖, 1595 - 1649]때에 목관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400여 년 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입향조도 알려진 바가 없으나 주민들이 짐작하기로는 광산김씨, 경주이씨, 전주이씨로 보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망운면 일대는 무안군내 다른 지역보다 일본인들이 많이 이주 해 살았다. 이곳의 지리적 특성을 이용하려는 일본인들에 의해서 압창 포구가 개발되고 1923년에는 이곳 압창과 현경면 동산리간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목화 쌀 등 곡물을 수집하는 조선 흥업회사 사무소가 압창 마을에 설치되고 그것을 보관하는 창고가 세워지면서 일본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제 말기의 망운비행장 건설과 일본전투기를 보관하기 위한 격납고 설치 등은 자연 일본인들이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해서 무안군에서는 제일 먼저 전기가 들어왔던 지역도 망운이었고 일본인만을 위한 일본인 소학교가 있었던 곳(망운 초 체육관 아래)도 몽탄면 명산과 함께 이 지역이었다.
송전은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
특히 북촌이라 말하는 목북은 마을 뒤에 소나무가 우거진 송전이라 부르는 둔덕이 있는데 이곳은 망운면에서 가장 높은 지역(해발 21미터)이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망운면에서 부자들이 살았던 마을이며 일본인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무안에 있는 두 개의 일본인 소학교 중 하나인 남소학교가 있었으며 학교 옆에 망운비행장을 관리하는 연대본부가 있었다. 또한 일본인 재향군인회 분회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송전에는 일본인 신사당이 있었으며 사당 옆에 3층 높이의 관측소가 있었다. 관측소는 망운 비행장을 살피는 역할을 했는데 관측소 뒤에는 비행기를 보관하는 격납고 있다.
특히 송전은 비가 오지 않을 때는 주민들이 정성스럽게 기우제를 지냈던 터이기도 하다. 해서 주민들은 상여가 이 둔덕을 넘어가려고 할 때는 지나지 못하도록 했으며 주민들이 신성시 했다. 또한 한국전쟁 때에는 조산 마을과 함께 봉홧불이 올랐던 지역이기도 하며 좌우익인사들의 처형장이기도 하였다.
이번 탐방에서 일제강점기의 귀중한 흔적을 발견했다. 일본인 소학교 정문 앞에 서 있었던 ‘忠魂碑’라는 비석인데 육군대장 一戶兵衛가 세운 비이다. 광복이 되면서 다릿돌로 사용되었던 비석을 이 마을 주민인 남승용씨가 찾아다 보관하고 있는 식민지 시대 유물이다. 당시 학교 앞을 지나는 모든 사람은 이 충혼비에다 인사를 하며 지나가야 했다.
마을 안에는 복촌 샘으로 부르는 샘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또한 20여년 전에 문을 연 조계종 소속 사찰 대운사가 있는데 천석꾼인 이상호의 집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