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서6리 장재마을 - 앞으로 부자가 될 마을
- 작성일
- 2016.08.02 16:33
- 등록자
- 조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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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는 목서6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마을이 형성된 역사가 짧다. 원래는 옆 마을인 대곡과 한 마을이었으나 1980년대에 분리(分里)가 되면서 대곡은 목서3리, 장재는 목서6리가 되었다. 조선시대 문헌인 호구총수에는 목서촌만 나오나 1912년과 1917년의 자료에는 망운면 장재동으로 나온다.
지명의 유래는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망운면에서 제일 가는 부자가 있어 ‘長子’로 불려오다가 후일 현재의 ‘壯才’로 부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어떻게 해서 장재로 불리게 되었는지 오히려 궁금해 했다. 마을회관 앞에는 부자터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현재는 빈자리로 남아있는데 왜 집을 짓지 않느냐는 물음에 주민들은 예부터 그 자리에 집을 지으면 孫이 없다 해서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이 마을에 정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많아야 100여년 전후라고 한다. 마을유래지에는 ‘설씨가 처음 이 마을에 들어와서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한 가구도 없으며 다음으로 劉씨가 들어와 살았다고 하나 역시 한 가구도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지로 주민들과 입향 연대를 추정해보니 전주 최씨와 광산 김씨가 100여년을 전후해서 이 마을에 들어왔다 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김해김씨, 회덕국씨, 홍주송씨 등이 살고 있다.
마을은 지둥개(북계동) 남계동 중계동으로 이루어졌으며 경사가 완만한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뒤에는 압해도에서 현경까지 이어지는 4차선 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간척지의 농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무안국제공항이 있고 뒤에는 탄도만이 있는 서해바다가 펼쳐져 있다. 마을에 가기 위해서는 망운면 소재지에서 운남면 쪽으로 1㎞ 쯤 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서면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입구에는 일제강점기 때 만들고 67, 68년도 한해 때 밀가루 배급으로 보완했던 장재저수지가 있다. 이 저수지 밑의 농지는 간척이 되기 전까지는 바닷물이 들어왔던 곳이다.
마을 뒤 서해바다에는 요강도(오강섬이라고도 한다)와 대섬이 있다. 요강도는 섬의 모양이 요강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대섬은 원래는 자라섬이라고도 했는데 섬에 시누대가 많아서 대섬이라고 한다. 오강섬은 마을 어촌계에서 길을 내놔 외지에서 가족단위 소풍객들이 많이 찾는다. 대섬은 풍수적으로 뛰어난 지형을 갖고 있어 일제감정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서 수난을 많이 당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섬의 자라목 부분에 쇠말뚝을 세 개나 박았고 외덕 마을의 일본군 부대에서 대포를 쏴 이 자라목을 자를려고 까지 했다. 그 자라목 부분에 온통 바위 뿐인데 그 위에 관리가 잘 된 무덤이 몇 기가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대섬은 약초가 많이 자라고 있으며 지네가 많다. 예전에는 사람도 살았던 적이 있어 옹달샘이 남아있다. 요즘에는 맷돼지 등 큰 동물이 살고 있어 쉽게 접근하기가 어렵다. 오강섬은 마을 소유인데 반해 대섬은 개인 소유다.
마을 회관 뒤에 있는 들은 지둥개 들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장재들이라고 부른다. 이 마을은 세대 당 소유한 농지가 적다.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어렵지는 않다. 농사만 짓던 예전에는 농지가 적어 빈촌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근래에는 낮에는 밭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탄도만 주변에서 낙지 등 어패류를 잡아 생활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넉넉하다. 실지로 낙지잡이가 잘 될 때는 한사람이 하루 저녁에 벌어들이는 수익이 7-80만원은 거뜬하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배를 갖고 있으며 세어보면 40여척이나 된다. 하지만 이렇게 배가 많은 데도 불구하고 어민들을 위한 시설이나 유사시에 배를 피하게 할 수 있는 시설이 없어 주민들은 불만이 많다.
낮에는 밭에서 저녁에는 탄도만에서 일하는 주민들
마을 입구인 광산김씨 문중 묘지 주변에 3기의 고인돌이 있었으나 밭을 경작하는 사람들이 가져가거나 깨 버려 현재는 없다. 또한 목포대학교 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마을 주변 두 군데서 유물들을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 입구 나지막한 구릉지와 해안가 구릉지인데 그곳에서 각종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유물은 숫돌, 회청색경질토기편, 그리고 적갈색연질토기편이 수습되었다.
마을회관 앞에는 30여 년 전에 만든 ‘망운면 새마을 공부방’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현재는 어촌계에서 사용하고 있다. 예전에는 이 마을 청년회의 활약이 대단했다고 한다. 마을의 애경사는 물론이고 모든 일에 나서 솔선수범할 뿐만 아니라 예의도 발라 주변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20여년 전에 밭 기반 사업으로 설치했던 물 저장고에 대해서 불만이 많다. 한 기당 수억원씩 세금을 들여서 만들었던 저장고가 주민들에게 도움은 커녕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장고의 운영비가 현실적으로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주변 농지를 절대농지로 묶는 바람에 재산권 행사에도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서해안 바다를 따라서 수백 기가 설치되었는데 사용되고 있는 저장고는 손으로 꼽을 정도라고 한다. 이 마을에는 3기가 있다.
마을이 희망에 차있다. 아름다운 마을 환경 조성에 모두가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무안군에서 역점사업으로 펴고 있는 노을길 조성 사업이 망운면에서는 이 마을이 중심이 되고 있다. 탄도만으로 넘어가는 노을은 망운면 최고의 절경이다. 이러한 절경을 감상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전망대가 설치된다고 한다. 또한 마을 주변의 해역은 청정수역이다. 이곳에서 잡은 낙지 등 수산물은 수산물 검사소에서 품질 등급 최고등급을 해년마다 받는다. 뻘이 좋고 오염원이 없기 때문에 찰지고 맛있다.
이 마을은 다른 마을과 달리 젊은 사람들이 많다. 바다에서 나는 소득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부부가 공동으로 일한다. 낮에는 밭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탄도만 해역으로 나가 낙지 등 수산물을 잡아 상당한 소득을 올리고 있다. 쉴 틈이 없는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