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서1리 용교마을 - 인바윗등을 안고 있는 방아다리 지형의 마을
- 작성일
- 2016.08.02 16:35
- 등록자
- 조OO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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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교는 피서1리에 속하는 마을로 마을에서 쓰는 이름과 행정에서 사용하는 이름이 다르다. 마을에서는 용교라 부르는데 각종 행정 자료에는 춘교로 나온 것이다. 원래의 지명은 마을의 형국이 방아다리(디딜방아라고도 하며 발로 밟아서 곡식을 찧거나 빻는 농기구를 말한다) 모습이라 마을 이름을 舂橋라 했다.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을 입구의 지형이 디딜방아 형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자의 舂은 ‘찧을 용’으로 ‘봄 春’ 字와 비슷하다. 해서 1912년의 지방행정명칭일람이나 1917년 조선면리동 일람에도 심지어 1987년의 행정구역일람에도 피서리 춘교로 나온다.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강릉유씨와 경주정씨다. 마을유래지에는 ‘마을의 형성은 조선조 중엽인 1540년경 강릉 유씨와 경주 정씨가 살게 되면서이다. 그 후에 여러 성씨가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300여년 전에 한두 가구로 시작하여 본격적인 마을의 형성은 조선시대 말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실지로 최초의 입향조는 강릉유씨 유일철(1807 - ?)이다. 운남면 하묘리에서 1800년대 중반에 이 마을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마을이름이 나오지 않으나 1912년의 자료부터는 마을이름이 나온다.
이 마을은 새터 방아다리 확골 등 세 마을로 이루어졌다. 새터는 방아다리 옆에 있는 마을로 새로 형성되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확골은 용교와 조금 떨어진 마을로 정착 마을 옆에 있으나 용교와 한 마을이다. 마을 이름을 학동 또는 학골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 표기도 춘교와 마찬가지로 잘못 사용하고 있는 지명이다. 확골은 확돌(돌절구)에서 나온 말로 예전에 곡식을 갈거나 고추 등을 빻을 때 사용하던 것으로 둥그런 돌을 우물처럼 파내어 그곳에 곡식이나 고추 등을 넣고 갈거나 빻아 사용하는 기구이다. 확골이 현재의 학골로 변한 것은 발음의 편의성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며 臼(절구 구, 확 구)谷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을에서는 주변의 지명을 이용한 노래가 전해온다. ‘장재의 큰 부자가 확골에 나락을 넣고 방아다리에서 힘을 주어 찧는데 쌀은 남고 왕겨만 두모의 지잿등(지앙등)에 쌓이더라’는 노래이다.
이 마을은 망운면 소재지에서 운남면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망운-광주 간 고속도로와 무안국제공항의 활주로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마을 뒤로는 809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어 주민들 말처럼 마을이 갇혀 있는 형국이다.
확골에 인바윗등이라 부르는 지석묘가 있다. 원래는 광산김씨 문중산으로 큰바위라고 불렀으나 왕망의 전설을 거치면서 현재의 印바위가 되었다. 고려건국에 공이 있었던 왕망은 왕건이 자신의 공을 챙겨주지 않자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웅거지였던 신안의 고이도에서 절치부심하며 설욕을 다짐하고 있었는데 그의 계획이 탄로나 도망치게 되었다. 왕망은 도망치면서 그가 사용했던 도장을 망운 두무치의 큰바위 밑에 숨겼는데 그것이 현재의 印바위다.
도장바위의 전설을 안고 있어
원래는 마당 바위라 부를 수 있는 커다란 두 개의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주민들이 어렸을 때 이 바위 위에서 뛰어놀기도 했다는 것을 보면 크기가 상당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하지만 도로 공사 등으로 깨어지고 쪼개져서 현재는 세 개의 바위와 굄돌 1개가 있다. 남아있는 바위 중에서 큰 바위를 재보면 길이가 3미터 10이고 두께가 80센티미터의 규모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지석묘 주위에 고총들이 많이 있었으며 가뭄이 들 때는 바위 주변의 무덤을 파서 비가 오기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인바윗등 주변에서 밭을 경작하는 확골 주민은 오래 전 경운기로 밭을 갈다가 원형이 잘 다듬어진 돌도끼와 화살촉 등을 발견했다고 한다. 참고로 인바윗등 옆에 전주이씨 묘가 있는데 묘의 상석에 臼岩이란 표기가 나온다. 臼岩이란 확골의 바위란 뜻인데 바로 인바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마을이 농지가 적고 물길이 좋지 않아 예전에는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특히 마을입구에 있는 한길 가의 논은 ‘댓병에 물이 가득 차야 모를 심을 수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하늘만 바라보는 논이었다. 마을 앞에 청죽샘이라 부르는 샘이 있다. 일제 강점기 때 비행장 공사를 하면서 인부들이 길러다 먹었던 샘으로 수량이 많았고 물맛도 좋았다. 현재는 곳곳의 지하수 개발로 물이 나오지 않는다.
마을 앞 망운에서 운남으로 가는 도로 옆에 길을 따라 150여 미터 정도의 길이의 진구렁이라 부르는 긴 계곡이 있었다. 지금은 메워져서 농사를 짓고 있지만 원래는 깊고 긴 계곡으로 소나무를 비롯하여 아카시아 나무 등 숲이 우거져 있어 주민들이 한낮에도 지나다니기가 꺼림칙할 정도로 무서웠던 곳이다. 그런데 한국전쟁 당시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죽임을 당했던 곳이다. 생매장을 당하기도 하고 죽창 등으로 찔려져 버려졌던 곳이기도 하다. 메워지기 전까지는 여러 기의 무덤이 있었고 자세히 보면 사람들의 뼈도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진구렁은 면사무소 뒤 망제라 부르는 곳에도 있었다.
마을이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고 역사가 길지 않지만 주민들의 단합이 잘 되고 있다. 여러 성받이가 살고 있어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으나 오히려 집성촌보다도 화합과 양보가 잘 이루어져 마을 발전이 기대되기도 한다. 특히 주민들의 소리가 마을 밖을 벗어난 적이 없을 정도로 화목함을 이루고 있다.
2004년 무안국제공항 건설 계획으로 동신대학교 문화박물관에 의해서 발굴되어 용교유적이라 이름 붙여진 곳이 있다. 마을 주변 해발 30미터상의 완만한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는데 삼국시대 주거지 6기가 발굴되었다. 마을회관 앞에 용교저수지가 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는 숯골 종실고랑 싯돌방죽 등이 있다. 또한 이 마을에서도 한국전쟁 당시 지역 간의 갈등으로 두 명이 희생을 당한 역사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