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서3리 정착마을 - 남북통일의 염원이 새겨진 입석이 있는 마을
- 작성일
- 2016.08.02 16:54
- 등록자
- 조OO
- 조회수
- 988
첨부파일(5)
-
이미지 피서리 정착1.JPG
344 hit/ 7.43 MB
-
이미지 정착2.JPG
271 hit/ 5.68 MB
-
이미지 정착3.JPG
288 hit/ 2.91 MB
-
이미지 정착4.JPG
271 hit/ 4.21 MB
-
이미지 정착5.JPG
275 hit/ 8.90 MB
정착마을은 망운면소재지에서 운남 방면으로 1㎞ 쯤 가다가 좌회전해서 공항 쪽으로 가면 나오는 마을로 망운국제 공항 비행장 활주로와 병립해서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행정구역명은 망운면 피서3리 정착마을이다. 원래는 당산끝머리라는 이름의 마을로 정착민들이 들어오기 전에는 세 가구가 살았었는데 현재는 한 가구도 남아 있지 않다.
이 마을은 이름 그대로 피난민들이 정착한 마을이다. 한국전쟁 이후 대체로 북쪽 서해안 지역에서 거주하던 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내려와 무안을 비롯한 진도나 목포 등 전남 각지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다 1956년 보사부의 피난민 입주 정책으로 망운면 피서리 산 69번지 98정보의 땅에 100세대 497명이 정착하면서 건설된 마을이다. 원래 이 마을 주민들은 정착이라는 이름을 싫어해서 정착농원이라 부르던 때도 있었다.
당시 이곳은 일본인 산전만길랑의 땅으로 일제강점기 때 비행장을 건설하다가 해방이 되자 황무지로 버려져 있던 곳이었다. 당국에서는 1957년에 이른바 ‘말집’이라 부르는 집을 지어 세 가구가 기거하도록 하여 분양했다. 다시 말하면 집 1채에 3 가구가 들어가 살도록 방 하나에 부엌 하나가 딸린 구조의 집이었다. 집이 완성되자 1958년부터 주민들이 들어와 살았다. 현재도 그때 지었던 당시의 집들이 남아 있는데 기존의 구조에서 양 옆으로 방을 늘린 구조이다.
현재의 정착마을은 당시에 비해서 마을의 세력이 많이 줄어들었다. 왜냐하면 마을의 일부가 공항으로 편입되기도 하고 주민들이 연고지를 찾아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공항이 들어서 있는 자리에도 정착 마을의 일부로 10여세대가 살고 있었는데 현재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고 없다. 정착세대도 두 분만 살아있다.
공항건설을 하면서 지금은 공항의 활주로가 된 정착 마을의 일부 지역에서 대형 가마터가 발견되었다. 1999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실시된 지표조사와 2000년도에 실시된 시굴조사에서 철기시대 수혈과 고려시대 토광묘가 조사되었다. 또한 백자 가마 2기와 공방4기 등 전통도자의 공방 구조와 도자제작과정을 알 수 있는 많은 자료를 발견했다. 주민들은 80년대 초까지 문화재 전문 도굴꾼들이 마을 주위를 많이 쑤시고 다녔다고 한다.
이 마을은 전국 각지의 피난민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마을이기 때문에 주민들의 단합이 염려되어서 물어보았더니 ‘어느 마을보다도 주민들간에 강한 결집력을 지녔다’고 한다. 왜냐하면 70년대 80년대 이석호 땅 사기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세청 공무원이었던 이석호가 서류를 조작하여 정착촌 일대를 자신의 친인척 소유로 바꿔버렸는데 그 땅을 되찾기 위한 투쟁에서 주민들이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전부 동참하여 이겨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처음 이곳에 정착할 때 정부가 준 98정의 땅을 갖지 못하고 미적거린데서 이같은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한편으로 씁쓸해 했다.
한때는 배뱅이굿으로 망향의 설움을 달래기도
이 마을의 주민들은 초기에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다. 환경의 척박함 때문이었다. 분배 받은 토지가 풀도 자라지 않은 박토여서 농작물이 자라지 않았다. 해서 처음엔 호밀 유채 고구마 등을 심다가 차츰 땅을 기름지게 해서 다른 밭작물을 심었다. 특히 주민들은 뻘밭의 뻘을 실어다가 밭에 뿌려서 농사 지은 것을 아픈 기억으로 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초기에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망운 면소재지에 나가면 주민들이 수군거리며 ‘사람하고 피난민하고 다닌다’라고 할 정도로 이단시 하였다. 또한 굶주림 때문에 큰 곤란을 느꼈는데 국제난민기구인 유섬에서 원조를 받아 근근히 생활할 수가 있었다.
이처럼 가난했기 때문에 아이들 교육에 신경을 쓰지 못한게 미안한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설날에는 배뱅이굿을 하며 망향의 설움을 달래기도 하였다. 고향의 맛을 내는 두부의 엿을 해서 나눠먹기도 했다. 해서 망향단을 이 마을에 있는 당산끝머리에 세우려고 했으나 군에서 현재의 물맞이 공원에 부지를 마련해줘 그나마 아픔을 달래고 있다.
오래 전에 밭농사가 아닌 논농사를 짓기 위하여 실향민 24명이 힘을 모아 지게와 망태를 이용해 간척지를 조성하기도 하였다. 1961년 이른바 용호지선이라는 지역의 만(灣)을 막아서 20여 정보의 농토를 마련한 것이다. 현재는 거의 묵답이 되어버렸지만 당시에는 주민들에게 대단히 소중한 식량 공급원이었다.
주민들은 공항에 대한 불만과 아쉬움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공항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공항 뒤편에 위치해 비행기 이착륙에 대한 피해를 입을까봐 우려되기 때문이다. 또한 비행장 설계에서부터 건설까지의 과정을 놓고 유당농원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현재의 이 마을의 위치는 활주로와 비교해 4-5미터에서 10미터 정도의 높이에 있다. 이 마을을 중심으로 공항 일대가 같은 높이의 지대였는데 활주로를 만든다면서 언덕을 깎아다가 창포호를 메우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공항 건설이 유당농원을 위한 건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마을에는 황해도 신천 반공의거 사건(1950년 10월 13일부터 장연의 15일까지)의 주인공이 살고 있었다. 전임 이북5도민 무안군 연합회장과 마을노인회장도 겸했던 이범영 옹인데 ‘매년 5월 8일이면 지역의 실향민들과 함께 임진각의 망향단에 가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제사를 지내고 온다’고 했다. 실향민들은 현재에도 이 마을에서만 40세대 이상이 살고 있다.
이 마을에는 ‘실향민들이 많이 있어서 북한식의 장례절차나 놀이문화 그리고 음식 문화 등을 개발한다면 마을의 소득원이 될 뿐 아니라 우리 지역의 좋은 문화도 되어 개발하여 가꾸었으면 하는 마음’이 탐방 중에 머리를 감돌았다.
망운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1985년에 세운 ‘피서3리 정착촌’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그 옆에 1미터 50㎝ 정도 되는 자연석에 ‘우리의 염원’이라는 제목 아래 “모든 것이 넉넉해도 한 가지 우리의 부족함은 화합의장, 바로 남북통일입니다”라는 입석이 세워져 있었다. 처음에 봤을 때는 의아하게 여겼으나 주민들과 대화를 하고 나서 그들의 절절한 남북통일의 염원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마을회관 뒤에 있는 뜰을 화골이라 했으며 현재는 빈집이 많이 있으나 한때는 이 마을의 주민들이 망운면에서 세 번째로 많았었다. 해서 이곳 학생들이 망운 면소재지에 나가면 그곳 주민들이 몰려다니며 와글와글한다 해서 ‘떼까우’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