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1리 두모마을 - 곰솔과 약샘, 그리고 인바위가 있는 꿩 형국의 마을
- 작성일
- 2016.08.03 10:28
- 등록자
- 조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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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모는 월곡과 함께 송현1리에 속하는 마을이다. 큰 마을 작은 마을로 불려지기도 하는데 작은 마을에 해당되는 월곡은 200여년 전에 파평윤씨 月谷 윤상은 윤참봉에 의해서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유래지에는 윤은보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고 하나 마을 앞 파평윤씨 집안의 무덤에 있는 비문과 월곡이라는 마을이름을 볼 때 윤상은에 의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아쉽게도 파평윤씨의 족보를 볼 수 없어서 더 이상의 확인은 할 수 없었다. 마을 앞에는 재잣등이라는 산이 있으며 산 아래에 확골이라는 들이 있다.
큰 마을에 해당하는 두모 마을은 김해김씨 金瑞甫(1584 - 1642)에 의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곳에서 터를 닦은 연대는 경상도 김해에서 이곳으로 온 1600년대 초반으로 추정되는데 당시에 주변의 풍광과 풍수적인 지형을 봤을 때 좋은 터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마을 이름의 한자 표기가 잘못 되었다. 마을 유래지에는 ‘토지가 비옥하여 보리가 많이 생산된 지역으로 마을 근처에 조금나루가 있어 國稅를 바칠 때 각처의 大麥을 이 마을로 가지고 와 말 소작했다 해서 말 ‘斗’자와 보리 ‘牟’자를 합해서 斗牟라 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의 의견은 다르다. 지세를 바탕으로 한 이름인 斗毛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마을의 지형이 꿩이 엎드린 형국[伏雉]이기 때문이다. 현재 곰솔나무 주변의 창령조씨 무덤이 복치 형국이다. 비행장으로 편입된 피서리의 일부가 솔개재에 해당하는데 그 솔개가 꿩을 노리고 있어 이 마을의 꿩은 비상하기 위해 엎드린 자세로 있기 때문에 마을 이름도 斗牟가 아니라 斗毛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민들이 알고 있듯이 斗毛雉(두모치 - 두무치로 음운 변화) 마을이다. 꿩알바위도 있다. 주민들은 공알바위라 부르기도 하는데 풍수적 지세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당산나무 옆에 있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영광군 망운면 斗毛村으로 나온다. 그러나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부터는 무안군 망운면 斗牟里로 나온다.
마을의 중앙에 해당되는 능선에 수형이 잘 잡힌 곰솔 두 그루가 있다. 1994년 문화재로 지정될 때는 네 그루였는데 그 동안 두 그루가 죽어 현재는 두 그루만 남았다. 주민들은 이 나무가 마을의 풍수적 지형인 꿩을 솔개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방패막이로 심었다고 한다. 곰솔은 소나무과로 잎이 소나무 잎보다 억센 까닭에 곰솔이라고 부르며, 바닷가를 따라 자라기 때문에 해송으로도 부른다. 또 줄기껍질의 색이 소나무보다 검다고 해서 흑송이라고도 한다. 바닷바람과 염분에 강하여 바닷가의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이나 방조림으로 많이 심었던 나무로 400여년 전에 입향조가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심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94년 1월 시도기념물 제148호로 지정된 이 나무는 마을에서 성황당 숲으로 생각하고 마을의 평화와 풍년을 기원하는 신성스런 나무로 보존해 왔다. 크기를 보면 한 그루는 높이 18m에 둘레 3.2m나 되고, 또 한그루는 줄기가 땅에서부터 두 개로 갈라져 자라고 있는데 둘레가 각각 2.8m와 3m에 해당한다.
인바위의 설화가 남아있어
조선시대까지는 정월 보름에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냈으나 일제강점기 때는 지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광복 이후 백중날에 다시 지냈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다. 곰솔은 마을 주민들이 대단히 신성시 여기는 나무로 낙엽도 함부로 채취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주민 중 한 사람이 쟁기로 밭을 갈다가 성에가 부러지는 바람에 성에에 쓸 나무를 이 곰솔 가지를 잘라 대신한 적이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은 아무 이유 없이 急死를 당한 일이 있었다. 또한 여름철에 이 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면 개미나 깔따구 모기 등 벌레들이 접근하지 않았다고 한다.
월곡 마을 뒤에는 바다에서 민물이 솟아나는 유명한 약샘이 있다. 장마가 들 땐 이 물에서 민물 장어도 잡혔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 메워져 있다. 유두날이나 칠석 백중날이 되면 외지에서 이 물을 이용하여 해수찜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여름철의 땀띠는 물론 부인병 등에 특효가 있다고 소문이 나 함평 영광은 물론 멀리 서울에서 오기도 한 것이다. 이 물이 얼마나 유명했던지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인들이, 근래에는 미국인들이 개발하기 위하여 수질검사를 크게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마을 사람들은 약수의 효험을 보지 못하고 외지 사람들만 볼 수 있다고 한다. 물이 얼마나 차갑던지 사람이 3분 이상을 물속에 있지 못한다고도 한다.
마을에 조개무덤이 있었다. 목포대학교 박물관의 자료를 보면 해안가 농지에서 패총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밭과 주변부에 다양한 종류의 패각류가 노출되어 있었으며 백자편 옹기편이 수습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민들은 그곳의 조개를 빻아서 비료 대신 사용하기도 하고 묘지를 조성하는데도 사용해버려 지금은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또한 이 자료에는 마을의 유물산포지를 기록하고 있다. 현재는 파평윤씨 세장산으로 현재는 잔디밭으로 조성되고 있는데 이곳에서 소량의 회청색경질토기편이 확인되었으며 이 잔디밭 안에 송현리 두모 고분이라 이름 붙인 장타원형의 고분도 있었다.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인 도로 옆에는 고인돌 4기가 모여 있는데 주민들은 이 바위를 印바위라 부른다. 인바위는 고려태조인 왕건의 숙부 왕망과 관련된 설화가 있으며 고이도의 왕산 설화와 연결되어 있다. 주민들은 이 바위에 공을 들이기도 했는데 자식을 낳게 해달라거나 병을 낫게 해달라는 기원을 하기도 했다.
마을에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있다. 이른바 토치카라 부르는 대공포대가 망운 비행장을 지키기 위하여 시계배미라 부르는 밭에 2기, 주민인 이재영씨 댁에 한 기가 있다. 모두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 포대는 모두 지하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저막금이 있다. 이는 해안가에 있는데 낙지 등 수산물을 팔았던 곳이다. 또한 시계배미(時期 배미)있다. 이곳에서 모를 심어야 농사철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농지이다. 시계배미 앞에 있는 들을 선들이라 한다. 죽배미가 있다. 얼마나 배고팠던지 죽 한그릇에 팔아먹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랫들이 있다 한자로 九野라고 하는데 마을 주변의 아홉 개 고랑에서 모인 물로 농사를 짓는다는 들이다. 마을 서쪽에 줄샘이 있었다.
마을에 현감공덕비와 감목관 비가 있었는데 현재는 목동공원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이곳에 왜 공덕비가 세워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