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4리 성동마을 - 물렛등의 전설을 안고 있는 마을
- 작성일
- 2016.08.03 10:36
- 등록자
- 조OO
- 조회수
- 927
첨부파일(6)
-
이미지 송현리 성동1.JPG
332 hit/ 4.27 MB
-
이미지 성동2.JPG
267 hit/ 4.51 MB
-
이미지 성동3.JPG
258 hit/ 6.91 MB
-
이미지 성동4.JPG
246 hit/ 2.26 MB
-
이미지 성동5.JPG
270 hit/ 5.53 MB
-
이미지 성동6.JPG
265 hit/ 2.14 MB
성동 마을은 송현4리에 속하는 마을로 조금나루길을 사이에 두고 성동과 유종동 두 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儒宗洞은 조금나루길 오른쪽에 있는 마을로 뒤에 서해바다를 등지고 형성되었다. 선비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선비 儒자를 쓰는 마을 이름이다. 실지로 이 마을은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금성나씨로 300여년 전에 들어왔다. 마을이 분지형으로 물의 흐름이 마을을 안고 돌아가며 마을 앞에 소류지가 있다. 마을 뒤의 능선은 중구등이라 하는데 망운면에서는 가장 높은 지대다. 그곳에 커다란 당산나무가 있었으나 태풍에 고사되었다. 동쪽으로 새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儒宗洞으로 나오고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과 1917년의 조선면리동일람에는 儒宗里로 나온다.
星洞 마을은 조금나루길 왼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해바다를 앞에 두고 있다. 마을의 형성은 유종동 마을보다 늦었다. 최초의 입향조는 김해김씨로 250여년 전에 들어왔다. 원래의 마을 이름은 풍수적 지형을 바탕으로 鼠隱洞이라 하였는데 마을의 지형이 쥐가 숨어있는 형국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실지로 맞은편 마을인 운남면 하묘1리 두곡 마을이 고양이 형국(족제비형국이라고도 한다)으로 상극을 이루고 있다. 이런 이름이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서 부르기 좋게 현재의 이름으로 바뀐 것이다. 실지로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서 처음으로 星洞이란 지명이 나온다.
성동 마을에서는 한때 우환이 계속적으로 발생해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었다. 이유는 마을의 풍수적 지형에서 비롯된다. 즉 주민들은 고양이가 노려보는 형국의 지형적인 약점을 보호하기 위해서 마을 앞 공유지 백호등이라 부르는 곳에 소나무로 조성된 비보 숲을 조성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공유지가 개인 소유로 바뀌고, 이후 소유자가 경지정리를 이유로 비보 숲을 베어버리고 농지로 만들자 그때부터 마을에 우환이 끊이질 않았던 것이다. 실지로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성동 출신 마을 이장들이 어려운 일을 겪었다. 해서 지금까지 송현4리의 이장은 유종동에서 맡는다고 한다.
1997년에 폐교된 망운 서초등학교 입구에 ‘문랫등(文來燈)’ 또는 물렛등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현재는 교회가 들어서 있지만 과거에는 밭이었다. 물레는 솜이나 털 따위의 섬유를 자아서 실을 만드는 수공업적인 도구로 시골에서는 중요한 재산 목록에 들어가는 것이다. 또한 文來라는 지명대로 학교가 들어왔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 물렛등에는 고인돌로 여겨지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물렛(문랫)돌이라 하는 것으로서 한 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그러나 마을에 우환이 연이어 일어나고서 부터는 신성시 여기는 돌이 되었다. 물렛돌은 물레가 돌아가면서 내는 소리와 물렛틀이 움직이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데 가롯대 위에 놓여지는 넓적한 돌이다.
문랫등의 전설이 있었다
어느날 밭을 경작하기 위하여 밭주인이 그 바위를 서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옮겨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마을에서는 알 수 없는 우환이 네 차례나 계속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그 즈음에 길을 지나가던 스님이 물렛등을 보고 ‘이곳에는 바위가 있어야 하는데 왜 없을꼬. 없으면 마을에 안 좋은 일이 일어 날 텐데’ 하며 혼자말로 하는 소리를 주민이 들었다. 그 소문이 마을에 퍼지자 주민들은 밭 주인을 설득해 바위를 원 상태로 돌려놨다. 그러자 그 이후부터는 마을에 우환이 없어졌다고 한다. 현재 물렛돌은 크기가 1/3로 줄어들어 교회 앞에 조성되어 있는 잔디밭에 놓여 있다.
이어 주민들 중 한사람이 이 물렛돌에 매년 정월 보름 제를 지내면서 마을에 우환이 수그러들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마을에 교회가 들어서면서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다. 주민들은 물레가 돌아가면서 내는 소리를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내는 소리라 생각해 地名의 지혜로움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실지로 망운서초등학교 졸업생들은 다른 학교의 학생들보다 재능과 지혜가 훨씬 뛰어났다고 한다.
마을의 지형이 구릉지대이다 보니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라 추정된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5-60년대에는 수많은 도굴꾼들이 마을을 헤집고 다녔다고 한다. 특히 선도의 광산김씨 묘가 있는 선도맷갓이라 부르는 곳은 도굴꾼들이 집중적으로 파헤쳤던 곳이다. 실지로 마을 주변 곳곳에 고총들이 많은데 주민들 대부분이 자기나 생활용품을 한두 점씩은 보관하고 있다. 또한 이장집 근처에서도 청자로 추정되는 밥사발과 분청접시를 발견하여 이장이 보존하고 있었다.
이 마을을 중심으로 망운면에는 자랑할만한 곰솔이 세군데 있었다. 조금나루와 구랫들 그리고 현재의 두모 마을의 곰솔이 그것인데 조금나루와 구랫들의 곰솔은 어른들 네 아름이 넘는 크기의 소나무였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송진 채취를 위해 베어버린 것이다. 당시에 주민들은 일본인들이 나무를 벨 때 소나무에서 핏물이 흘렀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두모 곰솔은 당시에 크기나 두께가 두 나무에 비해 작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예전에 성동 마을 앞에 조그마한 양식장이 있었다. 이 양식장을 두고 운남의 두곡 마을과 송현 마을이 약간의 다툼이 있었다. 이 다툼이 표면화 된 것은 한국전쟁 때였다. 하지만 주민들의 현명한 대처로 큰 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마을 주민들은 드물게 해제의 태원간척지에 대해서 아쉬움을 나타냈다. 태원간척지가 막히기 전까지는 마을 앞에서 상쾡이를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탄도만 주변의 각종 어류와 메생이 등 물길과 질 좋은 갯벌에서만 생산될 수 있는 수산물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는데 현재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해서 무안의 장래를 위해서는 태원 제방을 터서 예전의 물길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갯벌에 펼쳐져 있는 무궁무진한 자원은 인력만 미친다면 얼마든지 고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전에는 수십 명이 채취하던 석화 밭이 요즈음엔 두세 사람이 전부 채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백 명이 관리하던 어장이 지금은 5-6명이 관리하고 있어 마음 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을 주민들이 순하고 화합이 잘되는 마을이다. 두 마을이 합해졌지만 마을일에 서로 언성을 높이거나 얼굴을 붉힌 일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주민들 중에 어려운 일을 겪으면 내일처럼 서로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마을 앞에 절이 있었다는 봉사불이라는 지명이 있다. 또한 잔등밭, 안산, 구랫들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마을에는 보건진료소와 망운서초등학교 자리에 세워진 요양원 그리고 원송현 마을에서 옮겨 온 송현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