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산2리 지산 마을 - 김덕령 장군의 흔적이 덕영골로 남아있는 마을
- 작성일
- 2016.07.21 15:54
- 등록자
- 정OO
- 조회수
- 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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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은 지산2리에 속하는 마을로 청계면 청계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삼향면의 주산인 국사봉의 맥을 이은 신랑산(제주양씨 족보에는 侍郞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주민들 뿐 아니라 삼향북초등학교 교가에도 신랑산으로 나왔다)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제주양씨 문중산인 신랑산 아래에는 보갯등이라 하는 곳에 신부산이 있는데 이곳엔 가마문이라는 지명도 남아있다.
이 신랑산에 약초인 지초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 지산이라 했다. 주민들의 말로는 4-50년 전만해도 온 산을 지초로 덮을 만큼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주민들이 건강에 관심을 갖게 된 10여 년 전부터는 지초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지초는 여러해살이 식물로 뿌리는 자줏빛을 띠며, 예전부터 천연염료를 얻거나 민간요법에서 약재로 많이 사용했다. 그 뿐 아니라 진도에서는 紅酒의 원료로 사용하기도 한다. 마을 앞에 있는 농지는 100여년 전에 막았던 원둑으로 인해 조성된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농지가 목포사람 김용진의 소유였는데 주민들은 그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지명에 관련된 문헌을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나주목 삼향면 지산촌으로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삼향면 지산동으로 1917년의 자료엔 무안군 삼향면 지산리 지산동으로 기록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 마을은 동복오씨와 제주양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는데 동복오씨는 대부분 마을을 떠나 족보를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제주 양씨 입향조는 梁會源(자-호이, 1627-1678)로 확인할 수 있었다. 공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벼슬아치였으며 나주 동강면에서 세거하다 이 마을로 이주 하였다. 제주 양씨 족보를 보면 공의 후손들은 대대로 벼슬이 이어졌음을 볼 수 있다. 이 마을의 입향조로 마을유래지에는 양달원으로 나왔으나 제주양씨 족보에는 달원은 삼향에 들어온 적이 없었으며 회원과 달원은 형제였다.
원래 이 마을은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었는데 동쪽은 제주 양씨 집성촌이었고 서쪽은 동복오씨를 포함한 여러 성씨들이 모여 사는 복합 성씨 마을이었다. 예전에는 주변 마을에 비해 반촌으로서 위세를 떨치기도 하였다. 특히 이 마을 청년들은 억세어서 복룡이나 월호 등 주변 마을 사람들이 마을 앞을 지나갈 때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주민들은 배고픈 시절에도 바다에 나가서 갯것을 잡지 않았고 헛기침으로 권위를 세웠던 고집도 갖고 있었다. 한때 이 마을은 배 형국으로 샘을 팔 수가 없어 물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마을에서 청계면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덕영골은 배의 닻줄에 해당돼 광-목간 도로가 나갈 때 주민들의 반발이 심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신랑산의 줄기에 사두혈이라는 혈자리가 있으며 맞은편에는 매봉산이 자리하고 있다.
3등 9골이 있는 마을
마을에서 원둑을 지나 중산골로 가는 산모퉁이에는 ‘용둠벙’이라 부르는 龍沼가 있다. 지금은 주변에 집이 들어서 잘 보이지 않는데 집 뒤의 용바위에는 용이 승천 할 때 꼬리로 쳐서 흔적을 남겼다는 두 줄기의 골이 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용이 살았다는 용둠벙은 세 꾸리의 명주 실타래가 다 들어가도 바닥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고 한다. 지금은 수로로 쓰이고 있지만 한때는 그곳에서 어른 팔뚝만한 장어가 수십 마리 잡힐 정도로 고기가 많았다고도 한다.
예전에는 마을 곳곳에 4개의 서당이 있을 만큼 학문의 열기가 넘쳤다. 해서 주변 마을에서도 이 마을의 스승을 찾아 배우러 오는 학동들이 많았다. 이러한 마을의 학문적 열기는 판사 경찰서장 교수 등을 배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마을 주민들이 근면하고 부지런하다. 예전의 어른들은 무게만 잡을 줄 알았지 살림에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요즈음 마을 주민들은 부지런하고 활동적이어서 부촌을 가꾸어가고 있다. 특히 마을이 크고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도 서로를 배려하고 협조하여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가고 있다.
산이 깊거나 크진 않지만 마을에 3등 9골[三嶝九谷]이 있다. 정가등 보개등 머릿등이 3등이고 웃골 시랑골 지난골 마장골 성적골 합장골 절터골 덕영골 삼학골 등이 9골이다. 절터골에는 절이 있었으며 삼학골은 세 마리의 학이 앉아 있었다는 골짜기이다. 삼학골 뒤에는 학이 놀았다는 청계면 청계리 학유정 마을이 있다. 또한 마을에서 청계면 청계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덕영골이라 하는데 임진왜란 때 김덕령 장군이 이 고개를 넘어 왜적을 물리치러 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큰 덕영골과 작은 덕영골이 있다.
작은 덕영골로 가는 입구에는 1990년에 세운 밀양박씨기행비가 있다. 또한 마을 앞에는 1992년에 세운 효자비가 있다. ‘효자남계광산김공재형기적비’인데 김재형은 3년 동안 거동을 못하시는 부모님을 수발하며 집안에는 비린 것이 끊이지 않게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신랑산 기슭에 지호재라는 제주양씨제각이 있다. 안에는 ‘양씨종헌’이라는 액자가 하나 걸려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1986년에 세웠다. 삼문이 있으며 제각 옆에는 입향조인 양회순의 묘가 있다. 지호재 입구에 ‘절부여’라는 열부각이 있다. 아들인 양판근이 1966년에 세운 정려각으로 시멘트구조물에 안에는 ‘節婦 故士人제주양해이처나주임씨지려’의 정려와 두 개의 현판이 있다.
마을에 삼향북초등학교가 있다. 1941년 지산 간이학교로 개교하여 1943년 삼향북국민학교로 인가를 받은 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주민들의 울력과 토지 기부 등으로 세워진 학교이다. 마을 옆 1호선 국도에는 큰샘이라 부르는 마을 샘이 있었으나 국도가 나면서 묻혀져 버렸다. 매년 마을 청년회에서 노래자랑과 경로잔치를 실시하고 있다.
마을에는 성우도자기 중고판매장 옛날백반집 석재공장 등 많은 업소가 들어서 있다. 또한 마을 중앙에 구세군지산교회가 세워져 있다. 떡바위 이간지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 출처 : 무안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