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산3리 藿丹 마을 - 한약재가 많이 나는 마을
- 작성일
- 2016.07.21 16:11
- 등록자
- 정OO
- 조회수
- 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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藿丹 마을은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나주목 삼향면 藿丹村으로 나오나 1912년의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부터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한자 이름인 郭丹으로 나온다. 마을은 광-목간 국도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무안군청에서 목포 방면으로 약 15㎞ 정도의 거리에 있는데 지산리 군부대 약간 못 가서 오른쪽으로 꺾어 굴다리를 지나서 갈 수 있는 곳이다. 예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서 산과 바다를 연결한다하여 山水丹으로 불리기도 했다. 행정구역명으로는 삼향면 지산3리이다.
현재 표기하고 있는 마을 이름의 한자인 郭丹은 음을 따서 편리한 대로 사용한 한자어로, 마을유래지나 군에서 발행되고 있는 각종 문서에도 郭丹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잘못된 표기이다. 바른 표기는 藿(향초이름 곽)丹으로 써야 한다. 이의 근거는 1789년 당시의 호구수를 기록한 호구총수(戶口摠數)에 藿丹으로 표기가 되어 있다. 郭丹이 아닌 藿丹으로 써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원래 이 지역은 땅이 기름지고 주변 여건이 좋아 약초가 많이 나는 곳이었다. 芝山里라 쓴 것도 이곳의 산에 약재인 芝草가 많이 나는 지역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해서 이 마을에서도 ‘백곽로’라고 부르는 붉은 빛이 나는 한약재가 많이 나온다 해서 시충을 죽이는 약초인 藿丹이라 표기한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의 한자간소화 정책으로 쉬운 한자로 쓴 것이다.
입향조는 양성 이씨 李양으로 약 400여년 전 병자호란을 피해 나주 흥룡동에서 이 지역으로 왔다가 ‘산이 좋고 물이 좋아 가히 살만한 곳’이다 생각하고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양성 이씨는 현경과 해제에도 있다. 현재 마을에 후손이 살고 있어 양성이씨 족보를 통해 입향조를 찾아 보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지산마을에 살던 동복오씨들도 들어와 살았다.
이 마을은 물이 좋다. 마을 중앙에 있는 큰샘에서 나오는 물은 겨울에는 김이 모락모락 날 정도로 따뜻하고 여름에는 등목을 못할 정도로 시원했다. 또한 물맛이 좋아 원님에게 길러다 바칠 정도로 널리 인정받고 있었으며 주민들의 자랑거리였었다. 보통 물 1말에 9근의 질량을 갖고 있다고 하는데 이 마을의 물은 12근의 무게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1963년 어느날 주민의 꿈에 마을에서 木神이 나가는 것을 꾸었는데, 그 후로 태풍이 불어와 마을의 神木인 당산나무가 쓰러진 것이다. 해서 ‘박단’이라 부르기도 한다. 당산나무는 세 아름드리가 넘었으며 무성한 가지로 주민들의 휴식처가 되어 준 생활공간이었다. 당산나무가 죽자 그 아래에 있던 큰샘물의 물줄기가 말라버린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아무리 샘물을 옛날의 상태로 복원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으며 현재 당산나무가 있었던 자리는 밭으로 변하고 우물터만 남아있다.
서로 이해하고 도우며 화목하게 살고 있어
지형 때문에 집들이 北向을 하고 있어 주민들에게 이유를 물으니 아는 사람이 없다. 마을 앞에는 근래에 조성한 저수지가 있다. 이 저수지는 아랫마을 지산 사람들이 조성한 것이다. 조성 당시에는 저수지가 필요했지만 물길이 자유로 나있는 지금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마을의 지형이 협소하여 농지가 절대 부족한데 그나마 조금 있던 농지마저 저수지용으로 들어가 버리니 주민들의 안타까움은 컸던 것이다. 해서 주민들은 저수지를 터서 다른 용도로 사용할 것은 강구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마을의 지형이 좁고 긴 골짜기로 이루어져 마을 앞은 성적곡, 장자곡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마을 입구의 오른쪽 능선은 돌마산으로 부르며 목이 마른 말이 성적곡의 골짜기에서 물을 마시는 형국을 취하고 있다. 또한 국사봉의 맥을 이어 받아 명당자리가 남아있다는 마을 뒤의 거정골, 독안골이 있으며 마을 옆으로는 작은뒤는골 큰뒤는골 섬내 져드랑골 가나골 큰가나골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마을 앞 저수지 위에는 장자골이 있는데 그곳에는 지금도 초석과 기와조각이 나오는 절터의 흔적이 남아있다. 또한 그 뒤로 펼쳐지는 능선을 보개(교)등이라 하고 있다. 마을 옆으로는 일제강점기 때 묻은 상수관이 있다. 이 관은 함평 대동저수지와 몽탄달산리 저수지 물을 목포로 옮기는 통로이다.
마을의 터가 좁아 농토가 많지는 않지만 마을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고 화목하게 살고 있어 주민들의 위안이 되고 있다. 특히 물이 좋고 산림이 우거져 청정지역으로 주민들은 자연환경을 이용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있었다. 마을에 젊은이들이 없어 노인들이 자주 이용하는 마을회관은 서로 음식을 나눠먹는 등 새로운 마을의 공동체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 출처 : 무안문화원